2020년 10월 18일 연중29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 22:15-22
어제는 출근하자마자,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릴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성당과 홀을 그 어느 때보다 꼼꼼하게 청소했습니다. 종일 마음이 설레어 설교문도 잘 써지지 않더군요. 국민들의 협조와 방역 당국의 수고로 이렇게 성당에서 함께 예배드리니 너무나 감사하고 기쁩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죠?
거의 두 달 정도 영상예배를 드렸는데,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도 하느님께서 기뻐 받으시지만, 성당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영상으로 예배드리면서 믿음이 많이 약해지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코로나 일상 8개월을 살면서, 마스크를 잘 쓰고 방역거리를 지키며 손 씻기를 잘 하면 감염의 위험은 없는 것으로 검증되었습니다. 교회의 제일 큰 존재 이유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니 만큼, 방역수칙을 잘 지키면서 최고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기저질환자나 발열 등 몸의 이상 징후가 있는 경우에는 다중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는 것이 이웃 사랑의 실천이기도 하니, 스스로를 잘 살피고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코로나가 종식될 때까지는 애찬이나 대면 소모임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 선출되는 교회위원들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교제를 활성화해 가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제가 성공회를 섬긴지가 전도사 1년, 부제 2년, 사제 22년으로 25년이 되었네요. 아직도 여전히 저를 움직이게 하는 비전이 있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라’는 주님의 소명입니다.
제가 수원교회에서 5년간 보좌로 섬기다가 분립 개척을 나가면서 함께 파송 받은 교우들과 공유했던 비전이 있습니다. ‘21세기 대한성공회 안에 초대교회를 회복하자!’
먼저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고자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는 말씀공동체, 성찬과 기도에 전념하는 예배 공동체, 물질을 공유하며 서로 도와주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그 결과 사도행전 2장 47절에 보면, “이것을 보고, 즉 예루살렘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사는 새로운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합니다.
그 다음 주목하게 된 초대교회는 사도행전 11장에 등장하는 안티오키아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가해진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의 전도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11:19-20, “19 스데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신도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러나 그 신도들 중에는 키프로스 사람과 키레네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하고 주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안티오키아 교회를 통해 ‘찾는 이 중심, 균형 있는 성장, 진실한 공동체, 안 밖의 변혁’ 등 여러 가지 교회의 본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나룰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르나바와 바울로를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선교에 헌신했고 가난한 형제 교회를 돕는 일에 앞장 선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안티오키아 교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처럼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21절, 주께서 그들을 보살피셨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
교회 개척을 위해 파송 받는 교우들과 함께 ‘초대교회를 회복하자’는 비전을 품고 예루살렘교회, 안티오키아교회를 모범을 따라, 참 열심히 모여 기도하고 섬기면서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는 초대교회와 동일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서신 말씀을 통해서 세 번째 초대교회 모델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로가 실라와 디모테오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개척한, 데살로니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개척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로 일행이 유대인들의 모임에 가서 세 주간에 걸쳐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바울로 일행이 전한 복음을 듣고 여러 유대인과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 그리고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로 일행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거리의 불량배를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로 일행은 쫓기듯 그 도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문점이 있습니다. 바울로 일행이 유대인들의 모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데, 무엇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요? 성서를 놓고 토론하며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사도 17:2, “바울로는 늘 하던 대로 유다인들의 모임에 가서 세 주간에 걸쳐 안식일마다 성서를 놓고 토론하였다.”
오늘 서신 데살로니카전서가 신약성서 중에 가장 처음 기록된 바울로의 서신이니, 여기서 말하는 성서란 구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구약의 말씀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하시고 그 나라를 완성하시고자 다시 오실 메시아가 예수님이심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구약이 중요합니다. 구약을 관통하는 하느님 나라 사상을 바로 알아야 그 나라를 시작하시고 완성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모세오경을 통독 하는 이유입니다. 모세오경 통독에 열심히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세 주간 정도라는 짧은 기간 복음을 전하고 폭동이 일어나 데살로니카를 떠나게 된 바울로에게는 미처 충분하게 양육하지 못한 데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이 마음의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7,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신도들의 모범이 되었다. 8,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하느님을 잘 믿고 있다는 이야기가 사방에 널리 퍼져 나갔으니...”
데살로니카는 마케도니아의 수도이고 아카이아는 고린토의 수도인데, 데살로니카에 있는 어린 예수 공동체가 그 일대에서 모범이 되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2차 전도여행(50-52년경) 중 고린토에 18개월 동안 머무르면서(사도 18:11), 감사의 마음과 또 신앙적인 권면을 전하기 위해 데살로니카 전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인사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2절,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로가 감사를 표할 만큼 칭찬받게 된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3절,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1고린토서 13장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한 것’이라고 했듯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내용이 됩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활동! 영어로는 ‘work of faith’라고 합니다. ‘활동’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르곤’은 ‘일, 직업, 임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렇듯 믿음에는 반드시 실천이 따르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2:17, 26),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도 동일합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주시는, 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뜻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예배드리고 기도하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공동체의 지체,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환대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사랑의 수고로 이어집니다.
사랑의 수고! 영어 성경에는 ‘labor of love’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수고’로 번역된 헬라어는 ‘코포스’인데, ‘고난, 어려움, 번거로움, 괴로움, 자르다, 채찍질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데살로니카에는 생존의 기회를 얻고자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과 강도의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고대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 한가운데서 온갖 박해 가운데서도 기쁘게 하느님을 섬긴 데살로니카 교인들은 이렇게 가난하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을 섬기며 복음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
거듭 고백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내 안에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이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 사랑을 연습할 때 이 사랑이 자라납니다. 예배와 기도로 하느님과 교제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그 사랑이 흘러 들어와 내 안에 충만해 짐으로, 타인에게 흘러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 가운데, 예배와 기도 가운데 일하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카 교회가 보여준 신앙의 모범 세 번째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영어로 ‘patience of hope’이라고 합니다.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는 ‘휘포모네’는 말 그대로 ‘인내, 참음, 견딤’이라는 뜻입니다.
고전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속성을 보면, 첫 번째가 오래 참음이고 마지막이 인내입니다. 사랑하면 소망을 갖게 되고 인내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닮아가기를 갈망합니다. 인내하며 사랑의 수고를 다할 때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가 이루어지는 소망을 갖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 소망은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오늘 서신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을 여러분이 고대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들이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장차 닥쳐올 하느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실 분입니다.”
이렇게 데살로니카 교회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그 인근 지역에 모범이 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면 데살로니카 교인들이 불과 세 주간 짧은 시간 동안 복음을 듣고도 이렇게 모범이 되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9절 말씀을 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또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는 오히려 그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히브리어 ‘슈브’로,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께 돌아설 때 어디서 돌아섰습니까? 우상입니다.
돌아섬의 핵심은 ‘결단’입니다. 우상이 아닌 참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택하겠다는, 거짓이 아닌 진리를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회심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정체성과 소속감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1절 개역개정본으로 읽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보통 사람들은 하느님을 심판자의 이미지로 생각합니다. 하느님 앞에 전능하신, 신실하신, 능력의 등 여러 수식어 붙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카 교인들은 하느님이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라고 해도 좋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실패해도 일으켜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로마 황제에게만 붙이는 칭호 “주”라는 칭호를 예수님께 붙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카이사르가 주님이라는 칭호를 받던 황제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리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쳐라.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는 말로 카이사르 황제도 하느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그런 시각에서 당대 절대 권력자였던 페르시아 고레스왕도 하느님의 종으로 쓰임 받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어떤 이념이나 체제, 사람도 다 상대화 됩니다. 하느님만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뜻에만 순종하며 그분이 완성하실 하느님의 나라만을 비전으로 품고 그 나라를 일구어 갑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고백이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도 진정한 회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카 교회 당시의 우상은 보이는 것으로 존재했지만, 현대의 우상은 보이지 않는 가치관으로 우리 문화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를 살아계신 참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돈, 성공, 쾌락 등과 같은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들입니다.
이것들로부터 돌아서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고 참 하느님을 섬기기를 결단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여 언제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믿음의 활동,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살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성공회분당교회가 데살로니카교회처럼, 하느님 나라를 힘차게 확장해 가는, 서울교구와 대한성공회에서, 그리고 분당 성남 지역에서의 모범이 되는 교회로 우뚝 세워지며, 하느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교회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고 섬기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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