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1일 연중28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신부
마태 22:1-14
5일간의 추석 연휴를 보내고 또 엊그제부터 3일의 연휴를 보냈습니다. 청명한 하늘, 아름다운 구름, 밝은 햇살 등 계절과 자연을 만끽하라는 주님의 초대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 잘 지내고 계시지요? 보고 싶습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 동료 사제 몇 분과 영암에 있는 월출산 등반을 다녀왔습니다. 평소 등산을 하지 않았고 산세가 힘들어 혼자라면 중도에 포기했을 텐데, 함께 한 동료들이 있어서 산행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함께 걷는 길벗이 참 소중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신앙의 여행에서 교우 여러분 서로서로가 길벗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힘겹게 산을 오르는 길에 은퇴 후 산행을 취미로 하신다는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아내 되시는 분의 연세가 68세신데, 남들이 1시간 가는 거리를 2시간 걸려 가기에 차박을 하고 아침 일찍 올라가셨다가 내려오는 길이라고 하시더군요.
저희도 마침내 정상에 찍고 그분들이 오르셨던 코스로 하산했는데, 진짜 힘든 코스였습니다. 노부부가 정말 존경스럽더군요. 집에 와서 아내에게 체력 관리 잘 해서 은퇴 후 돈 안 드는 취미 생활로 등산 다니며 살자고 했네요.
먹고 사는 것이 녹녹치 않아 바쁘고 힘들어도, 자연과 벗하는 삶의 여유를 갖는 것, 몸과 생각과 영혼을 단련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기도와 공부, 그리고 운동에 더 매진하는 가을이면 좋겠습니다.
요즘 저는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많이 걷고 기도하면서 주님께 그리고 이웃과 자연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게 많이 생각납니다. 이런 제 마음을 담은 시가 있어서 오늘도 가을 시 한편 읽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가을에는 -
강인호시인
물소리 맑아지는 가을에는
달빛이 깊어지는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에는
쑥부쟁이 꽃피는 가을에는
어인 일인지 부끄러워진다
딱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가을에게
자꾸만 내가 부끄러워진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복음 말씀으로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그리고 오늘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 비유들은 앞서 성전 정화 사건으로 촉발된 대사제들과 원로들 등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립에서 나온 말씀들입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라는 아버지의 말에 처음에 싫다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간 큰 아들과 가겠다고 대답만 하고 가지 않은 둘째 아들이 등장하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듣고 회개한 세리와 창녀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는데, 이에 반해 회개하지 않는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더 날카롭습니다. 도조를 내지 않자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이고 마침내 아들까지 죽이며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소작인들이 바로 그들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비유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칼날처럼 날카롭기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대립했던 이들은 이 비유들을 들으며 분노했습니다.
지난주일 마태오복음 21장 45절을 보면,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예수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질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닌지? 주인이신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도조를 내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가 주인인양 살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던져지는 성경의 질문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혼인 잔치는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절,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잔칫날은 심판의 날인 동시에 구원과 해방의 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살던 이들에게는 심판이지만, 가진 자들에 의해 억압받고 수탈당해 숨죽이며 가난하게 살던 백성들에게는 기쁨의 날이 됩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는 이런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잔칫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사 25:7-8, “7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8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주시리라.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도 앞서 두 비유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던 이스라엘이 버림받고 하느님께서 새로운 이스라엘(교회)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하느님의 계획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선택받았던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버림받게 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5-6절, “5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임금의 초정에도 ‘밭에 가고 장사하러 갔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물질 중심의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고 그것을 섬기고 따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물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물질을 숭배하며 하느님을 무시합니다.
5절을 묵상하며 떠오른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6장 24절 말씀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여러분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임금이 잔치에 초대하려고 보낸 종들을 죽였다는 6절의 말씀은 앞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보여준 소작인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수많은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을 무시하는 인간들은 하느님이 만드신 자연,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죽이는 반생명적인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잔치에 초청하는 대상이 바뀝니다. 9절,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여기서 ’거리‘는 ’변두리, 국경‘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더 맞습니다.
유력한 사람들이 아닌 변두리 인생들이,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초청을 받고 그 나라에 들어오게 된 초대교회 상황을 보여줍니다. 10절,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리하여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표지인 교회의 구성원이 된 것은 어떤 윤리적 기준이 아닌,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요청되는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누구나 초대받고 왔지만, 임금이 주는 예복을 입어야 잔치를 계속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었던 사람도, 화려한 옷을 입었던 유력자들도 왕이 주는 예복을 입을 때, 동등하게 잔치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복이란 무엇일까요?
요한묵시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묵시록 19:7-8,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되었다.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고, 8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다운 삶, 즉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복음에 나오는 “도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초대 받았지만,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잔치에서 쫓김을 당합니다. 몇 주 전 일만 달란트 탕감 받는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아 탕감 받은 것이 무효화되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비유이야기와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비유의 결말을 싫어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어떻게 심판할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착각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공의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악을 싫어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물론 사랑의 하느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하지만 그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대로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끝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뽑히는 사람’이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운명이 뽑는 분이신 하느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주권적인 은총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불러주신 분께 감사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우리 인간의 책임과 순종, 하느님 나라 백성다운 삶 또한 중요합니다. 은총은 반드시 신앙적인 실천이 동반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복음만 묵상하는데, 어제 1독서 갈라디아서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3:27,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이렇듯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 백성답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어 가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에페 4:13,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2독서 필립비서는 그리스도를 옷 입은 신자들이 입은 예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공동체로 살아가는 하느님 나라 백성의 생활 지침입니다.
이것을 다시 읽어 드리며 설교를 마칩니다. 눈을 감고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믿으며 굳세게 살아가십시오.’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한마음이 되십시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으십시오.’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들은 것과 본 것을 실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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