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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7년 10월 21일 (연중29주일) 설교 (루가 18:1-8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0. 19.

루가 18:1-8 [과부와 재판관]

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 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3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 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읍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4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 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5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 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 들어라. 7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8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루가 18:1-8)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제자들에게 원하신 간곡한 뜻이었습니다. 이 비유를 “하느님도 우리가 무작정 졸라대면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말씀이로구나.” 또는 “하느님은 일부러 지체하시며 우리를 떠보시다가 응답하시는 분이로구나”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그럴까봐 주님께서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고약한 재판관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지못해 응답하시는 분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이것이 주님 말씀의 결론입니다. 따라서 비유의 핵심은 “고약한 재판관조차도 간절한 탄원에는 하는 수 없이 마음을 바꾸는 법이거늘,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야 하물며 더 말해 무엇하랴!” 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직접 세상과 부대끼며 삶을 살아가노라면 그 하느님의 자비를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 빨리 빨리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을 의지하려고 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리라는 것, 우리가 하느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만 잊기 쉽습니다. 그래서 결국 초조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아, 인생은 고달프고 슬픈 것이로구나. 왜 세상은 이 모양인 것일까?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고 한탄합니다.

“과연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신 주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기도하는 삶입니다. 기도란 초인(超人)이나 성자(聖者)가 되기 위한 수행(修行)도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 수단도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이고, 하느님의 힘과 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의탁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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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3년 전의 설교원고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수요 영성모임>의 렉시오디비나에서 이 본문을 다루면서 새로운 해석을 얻었습니다.
 
저희는 렉시오디비나를 약간 변형시켜서 교우들의 나눔을 제가 신학적으로 종합해주는 시간을 갖습니다. “말씀을 통해 이루는 관상의 경지”라는 본래의 취지와는 좀 동떨어지지만, 우리 수준에는 도리어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이점은 미묘한 부분인데, 저는 렉시오디비나가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을 무시하면 곤란하다고 사목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오늘 나눈 말씀을 정리해서 노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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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는 찬찬히 읽어보니 생각보다 해석이 어려웠습니다.

교우 한 분이 소감을 말씀하시되, 왜 과부는 재판관에게 매달려 시간을 허비하는가, 하느님께 직접 호소하면 지체없이 응답을 받았을 터인데... 하십니다. 보통 이 말씀이 비유의 말씀이니만큼, 재판관과 하느님의 위상을 비슷하게 이해하면서 제가 3년전에 해석했듯이 “고약한 재판관도 이러한데 하물며 자비하신 하느님이야” 하고 “하물며 용법”으로 해석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재판관 말고 하느님에게”라고 해석하시는 것을 보니 좀 엉뚱하지만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니 바로 앞부분에 루가 7:20절 이하에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날을 단 하루라고 보고 싶어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마치 번개가 번쩍하여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환하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그 날에 그렇게 올 것이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일상생활의 가치에 연연하다가 그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올 때를 놓치고 망하고 만다는 말씀이 되풀이 강조됩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말씀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니 오늘 본문의 중심문장은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는 말씀으로 떠오릅니다.

즉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들의 소원성취를 위해서 끈기있게 매달리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기도에 관한 교훈” 말씀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나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신자의 “종말론적인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말씀인 것입니다.

3년 전에 저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선입견에 가까운 전제로 그저 “기도”에 촛점을 맞추었던 거지요.

촛점이 “종말론적 삶의 태도”로 바뀌니, 비로소 “기도의 본질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것임”을 그리고 “신앙생활이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에 용기를 잃지 않는 일임”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왜 고약한 재판관을 비유로 드셨는가가 분명해집니다. 이 과부는 “저에게 억울한 일 한 사람이 있는” 것 때문에 올바른 판결을 구하지만 고약한 재판관은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이는 비유를 위한 설정이기 이전에,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를 풀려다가 고약한 재판관같은 인간이나 제도에 당해본 경험이 없습니까? 이 말씀을 들으며 과부의 이중으로 억울한 처지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 비유를 진실로 해석해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나라가 뭐냐?” 는 중요한 물음은 이 대목에서 “억울한 일이 없는 세상”라는 답을 얻습니다. 우리 세상살이의 고통의 본질은 “내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고 “그 억울함을 풀어줄 권세가 전혀 내 편이 아니라”는 경험입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나라, 사람의 아들의 영광은 군사력을 통하여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된 유대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는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는” 세상, “억울함이 없는 세상”“억울함이 풀리는 세상” 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사람의 아들의 영광인데 이 또한 십자가의 죽음은 참으로 억울하고 억울한 사건이고 부활체험은 바로 하느님께서 이 억울함을 알아주시고 풀어주셨다는 체험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가르치시고 온몸으로 살아내시어서 하느님나라의 주권을 물려받으신 것이지요!
 
생각하면 “억울함”이 세상살이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세상의 죄와 고통은 바로 억울함의 원인과 결과입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억울해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억울함도 없다구요? 좋은 것 같지만 어쩌면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억울함 없는 내가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행하고 있는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없는 세상살이가 불가능한 것처럼, 억울함이 없는 인생살이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한 일은 사실 억울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한 일을 아무런 반성없이 그저 좋은 결과로 만들어달라는 기도는 이상합니다. 내가 잘못을 고치고 잘 수습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맞습니다.) 공평한 룰을 통해 얻은 결과도 사실은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가령 운동경기에서 우리 편을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는 넌센스입니다. 공정한 경기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맞습니다.)

문제가 되는 억울함은 부당하게 어떤 이가 내게 행한 억울함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 억울함을 무시하는 기득권이 주는 이중의 억울함입니다. (이 때 억울함은 인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 부당한 억울함을 가하는 세력이 바로 ‘죄’요 ‘사탄’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억울함이 풀리려면 죄는 용서되어야 하고, 사탄은 추방되어야 하고, 인간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일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느님 나라의 일입니다.)

이 때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을 향해 힘을 얻습니다. 시편의 탄원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억울함을 못견디는 마음, 그 억울함을 풀려는 마음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그 억울함을 아뢰는 마음, 하느님께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을 신뢰하는 마음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자, 우리가 대답해 봅시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하느님의 나라를 진실로 원합니까? 어떤 하느님의 나라입니까? 죽은 후에 또는 돈을 많이 벌어서 누릴 수 있는 사철 온화한 기후에, 풍성한 과일나무, 금은보석이 넘쳐나는 이상향이 하느님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품에서 모든 이의 눈에서 눈물이 씻겨지는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과연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다른 이의 눈물을 보며 간절히 하느님의 나라를 기원합니까? 그저 대충 사는 일에 만족하지 않습니까? 우리자신과 우리 주위에, 크게는 이 초록별 지구상에 억울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저 "팔자가 기구하구나, 재수가 없는 거지, 사는 게 그저 그런거지" 하며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우리 욕망을 성취하려는 동기에서가 아닙니다. 바로 억울한 이들의 억울함이 모두 풀어지는 세상, 그래서 억울함을 당한 이와 억울한 일을 행한 이가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하나가 되는 그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입니다.

저와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 모두 이 ‘믿음’으로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않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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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전하는 말씀일까요?  우리 교회주보 말씀란에 맞춘 분량으로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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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루가 18:1-8)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신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단순히 ‘끈질긴 기도의 효력’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맥락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은 하느님나라의 도래, 곧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의 태도’에 관한 가르침에 이어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무슨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종말론’은 세상이 언제 망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부딪혀 이 ‘세상 나라’가 산산조각 나는 소망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성공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의 함께하심에 소망을 두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 일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재판관의 ‘고약함’에 대비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강조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새겨들으라고 하신 고약한 재판관은 생각은 이러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여기에 무슨 교훈이 있을까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하느님도 졸라대야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말씀일까요?. 또는 하느님은 일부러 지체하시며 우리의 정성을 시험하시다가 응답하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이 교훈을 깨달으려면 우리가 머리가 아닌 삶의 경험으로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고약한 재판관”은 단순히 비유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예수님 말씀을 듣는 많은 이들이 실제로 삶 속에서 고통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현실에서 나온 캐릭터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고약한 재판관 같은 인간이나 제도 때문에 치떨리게 억울한 적이 있질 않습니까? 생각하면 “하느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약한 재판관”은 바로 물신(物神)을 섬기고 기득권(旣得權)을 고수하는 “이 세상” 자체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충 세상을 살아가며 이런저런 바라는 것을 청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락한 교회의자에 앉아서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도는 우리의 삶, 우리의 이웃과 세상에 “억울함(원한)”이 사라지도록 하느님께 ‘밤낮 부르짖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속히 올 것을 믿는, 이 세상에 집착 없이 의연한 믿음! 우리에게 주님은 물으십니다. “과연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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