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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7년 10월 14일 (연중28주일) 설교 (루가 17:11-19 나병환자 열 사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0. 12.

감사와 찬양이 우리의 믿음! (루가 17:11-19)

오늘 루가복음은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셨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진짜 전하고자 하는 것은 그 기적 자체의 대단함이 아니라 그 기적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입니다.

천형(天刑), “하느님께 저주받았다”고 여겨지던 나병환자들의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는 탄원은 정말 절박한 간구였습니다.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여라” 하신 말씀은 아무런 조건 없이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치유의 은총을 내리셨음을 뜻합니다. 나병이 치유된 것을 판단하고 다시 공동체에 복귀하도록 하는 권한이 사제에게 있었기에 사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병이 나은 아홉 유대인은 사제의 인정을 통해 다시 마을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복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다시 예수께 돌아온 한 사람의 이방인을 보여줍니다. 이는 다른 아홉의 배은망덕함을 드러내서 사람은 모름지기 “감사의 예의를 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처세훈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이 나으면 꼭 내게 돌아와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말씀 그대로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감사와 겸손과 같은 덕 마저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규율을 따르는 걸로 생각하곤 합니다. 신앙은 그것을 내면에 강제하는 수단으로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런 차원을 훨씬 초월합니다. “오직 믿기만 하라”는 말씀, “오직 믿음”의 믿음은 어떤 내적 규율의 강요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내면에 깊이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 신뢰는 지적인 논리를 의지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죄”로 깊이 느끼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용서”로 깊이 경험하는 일이 됩니다. 그 신뢰는 단순히 하느님을 우리의 해결사로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이만큼 신앙적 헌신을 드릴테니, 이런 소원을 성취해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 신뢰의 믿음은 세상의 고통과 시련과 무상함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통해 나의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행복, 곧 “영원한 생명”을 깨닫게 합니다.

홀로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양한 이방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신 말씀은 구원의 그 깊은 차원을 알려줍니다. 아홉 사람처럼, 우리도 때로 우리가 부르짖은 믿음의 댓가, 또는 행운의 결과를 감사드리곤 합니다. 그 감사는 찬양을 담은 감사로 더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과 능력을 일상에서 깨닫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 그 감사와 찬양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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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쳤다.

14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16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18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19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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