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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나눔

대한성공회 초기 의료선교사 랜디스 박사를 기억하며

by 분당교회 2018. 10. 28.

대한성공회 초기 의료선교사 랜디스 박사를 기억하며

故 랜디스 박사의 약력 (Dr. Eli Barr Landis / 세례명 : 엘리야 Elia / 한국 이름: 남득시) ♣ 이 약력은 『인천내동교회 110년사』에서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랜디스는 1865년 12월 18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출생하였고, 20세 때에 밀레스빌리에 있는 국립사범대학교 의예과를 졸업한 후, 필라델피아대학 의학부에서 공부하였다. 랜디스는 이 무렵 미국성공회에서 세례와 견진을 받았다. 1888년에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성공회가 운영하는 ‘제성요양소(All Saint Convalescent Home)’에서 근무했다.


랜디스 박사는 조선성공회의 첫 주교였던 존 코프(Charles John Corfe)와 함께 1890년 9월 29일에 제물포에 왔고, 그해 10월 10일에 병원을 개업하였다. 이것이 인천 지역 최초의 서구식 병원이었다. 3개월 후 진료 통계를 냈는데 환자 34명, 약국을 찾은 건수가 76회, 방문 진료 25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좌측, 성누가병원 / 우측 앞줄 故 랜디스 박사)


1891년 8월에는 송학동에 병원을 지었는데 이 병원의 모양은 순 한국식이었고, 병실도 온돌로 되어 있었다. 병원은 ㄷ자 배치로 이루어졌고 ㄷ자형의 트인 쪽이 한국인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대문은 남쪽에 있었고, 그 양쪽으로 환자 대기실, 진찰실, 랜디스 박사의 숙소 그리고 창고가 있었으며 서쪽은 일꾼들 방, 부엌, 식료품 저장소, 연료창고, 그리고 목욕탕이 있었다. 북쪽은 모두 온돌마루로 된 병실들이 있었다. 방의 벽돌에는 랜디스 병원에서 치료받았던 환자들이 기증한 서예와 그림들로 장식되었다.


병원의 이름은, 병원 문을 연 날이 마침 성 루가 축일(18일) 무렵이었기 때문에 ‘성루가병원’이라 지었다. 그렇지만 박사는 이 성루가병원이라고 하는 이름이 한국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하였는지, “즐거이 선행을 하는 병원(Hospital of Joy in Good Deeds)”이라는 뜻의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박사가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남달리 잘 이해하며 배려했다는 것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1895년에는 인천시 중구 내동 3번지에 고종황제가 희사한 땅에 서구식으로 새롭게 건물을 지었다.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에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환자들 대부분은 인천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인근 강화도를 비롯한 섬지방과 충청도, 황해도 심지어는 전라도 지방에서 배편을 이용하여 병원을 찾아온 이도 있었다. 1892년의 통계를 보면 총 3,594명의 환자를 치료하였고, 1894년에는 환자가 더욱 늘어나 외래 환자와, 랜디스 박사가 방문해서 치료한 환자를 합쳐서 4,464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당시 20대의 젊은 의사로서 따뜻한 인류애와 탁월한 의술을 가지고 진료활동에 전념했다. 의료 혜택을 입은 사람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으며 그의 명성도 점점 더 커져갔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1897년 박사는 순 한국식으로 생활하고 싶어서 인천 송림동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했는데 물이 나쁜 관계로 장티푸스에 걸려 1898년 4월 16일에 33세의 나이로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장례식은 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한국식으로 치렀다. 시신에 한복 두루마기를 입혀 송학동에 있는 외국인묘지에 안장하였다. 이후 청학동 외국인묘지로 이장하였다가 그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인천가족공원으로 다시 이장하였다.


그의 업적 중에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박사는 바쁜 병원 생활 중에도 한국어를 익혔고 한문도 배웠다. 그러면서 한국민속 가운데 가례(家禮), 동화, 한국의 귀신, 한의학, 동학사상, 속담, 불경 등에 관한 것을 수집하여 연구하고 발표하였다. 우리 민족이 자랑하는 의학서적인 동의보감도 일부 번역했을 정도였다. 그가 당시 연구하기 위해 수집했던 많은 서적 그리고 그가 직접 쓴 글 등 약 300권이 지금도 연세대학교 도서관 내에 보관되어 있다. 이를 ‘랜디스문고’라고 하는데, 당시의 한국문화를 연구하는데 지금도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박사가 운영하던 이 병원이 얼마나 유명했던지 현재의 자유공원이 있는 이 메무리산의 일부를 ‘약대인산’(藥大人山)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는 1892년에 여섯 살 난 고아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아 기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인천 지역 고아원의 효시가 되었다. 그 후 그의 고아원을 통하여 많은 고아들이 세례를 받은 것을 보면 그가 여러 고아들을 돌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아울러 그의 한국 사랑이 어떠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청일전쟁 때에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한 중국 군함에 탄 군인들을 정성으로 치료하여 준 일이 있었다. 이를 감사히 여긴 중국 황제가 박사에게 쌍용(雙龍) 훈장을 수여하였다.


박사가 돌아가신 뒤에도 성루가병원은 지속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성루가병원이 부상당한 러시아의 군인들을 치료해 준 일이 있었는데, 2004년 러시아 대사관은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동판을 제작하여 인천내동교회에 기증했다. 이 동판은 병자들을 위하여 빨간 벽돌로 지은 건물(현재의 사제관) 외벽에 붙어 있다.

랜디스 박사의 고귀한 삶과 안타까운 죽음을 삼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린다. 


* 교회력으로 지난 10월 10일이 대한성공회 최초 의료 선교사 남득시(랜디스) 기념일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2시 30분에는 인천내동교회에서 서울교구 서부교무구 주관으로 랜디스 박사님의 120주기 기념 추모강연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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