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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곁으로

by 분당교회 2017. 4. 30.

2017년 4월 30일 성공회 분당교회 설교, 김장환 엘리야 신부

곁으로


오늘은 분당교회 설립 1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8년 전 이 교회를 개척하신 전석달 신부님과 이후 섬기신 임종호 신부님, 이주협 신부님, 장기용 신부님 등 여러 신부님들의 기도와 헌신을 기억합니다. 아울러 지난 18년 동안, 본 교회를 섬기시며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워 오신 교우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이 교회를 세우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교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입니다. 몸은 머리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의 뜻과 모범을 이 땅에 이루어가는 공동체가 교회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머리이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17절을 보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을 때 그들의 표정이 “침통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불과 8일 전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환호성을 지르며 종려나무 가지와 옷을 벗어 그 길에 깔아 주는 모습을 보며 “이제 혁명의 날이 왔구나. 그 옛날 다윗 왕 때와 같은 이스라엘로 회복되겠구나. 나도 한 자리 차지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그 예수가 십자가 나무에서 비참하게 죽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들의 생명도 위협을 받을까봐 예수를 배반하고 도망치면서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겠습니까? 은밀하게 모여 대책을 논의해봤지만 뾰족한 대안은 없고 몇 몇 여인들이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상한 말만하니 더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은 예수가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다윗왕 때와 같은 영광을 회복시켜 줄 정치적인 군사적인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 죽음의 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시간들이 헛되게 느껴지고 스스로가 한심하게 생각됐을 겁니다. 


이제 그들이 믿고 따랐던 스승이 처참하게 죽은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이렇게 두 제자는 실패와 좌절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내리막길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 자신들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함께 걸어가면서 말을 건네 오고 그들이 당한 일들을 들어주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으로 십자가의 사건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함께 머물면서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 때까지 두 제자는 그 사람이 예수인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실패와 좌절로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동안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최후의 만찬과 동이랗게 묘사합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의 성체와 보혈을 먹는 감사성찬예배에 주님 만나는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은총이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된 두 제자는 이제 내리막길 여정을 돌이켜, 고통과 두려움의 땅이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두 제자에게 부활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실패하고 좌절한 인생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리막길 인생들 곁으로 오시어 함께 걸어가십니다. 그들과 같은 보폭으로 걸어가시면서 그 가는 길이 얼만큼 멀든지 함께 하십니다. 먼저 말을 건네 오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실패라고 여기는 그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함께 머무르며 밥상을 나누는 사랑의 주님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실패와 좌절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됩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다시 일어서는 부활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이 생각납니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 예수님이 산으로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가 그들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여기서 “나다”라는 말씀은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I am who I am. 나는 나다.” “여기에 지금 너희와 함께 하고 있는 하느님이다.”라는 말입니다. 80먹은 모세가 뭘 믿고 이집트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어떤 분의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고 나오려는데 문이 잘못되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워 떨며 아버지를 소리쳐 부르는데, 시간이 좀 지난 후 아버지가 그 외침을 듣고 왔습니다. 아빠는 밖에서도 문이 열리지 않아 좁은 창문으로 들어와서는 자신을 꼭 안아주며 “아빠다. 무서워하지 마라. 아빠다. 울지 마라 아가야.”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어 잘 살다가 큰 환란을 만났다고 합니다.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에 힘들어하는데, 어렸을 때 변소에 갇혔을 때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막힌 문을 열어달라고, 출구를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마치 어렸을 때 아빠가 자기를 안아주듯 자신을 안아주시는 하느님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느님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면 하느님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말씀하셨답니다. 거듭 3번을 “문을 열어 달라”고 했는데 그 때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만 하셨다고 합니다. 그제야 믿음이란 “내 곁으로 오시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곁으로 오시어 함께 걸어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두 제자처럼 내리막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정서적 정신적인 이유, 육체의 질병으로, 깨어진 가정과 인간관계로, 또 세월호 참사같은 예기치 못한 사고와 환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외로워하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리고 막막한 생계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조조정으로 명퇴를 당하고 퇴직금으로 가게를 차렸는데 경영이 어렵기만 합니다. 조물주 위에 있는 건물주들의 배만 채워주고 문을 닫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랑하여 결혼했지만, 불화하고 깨어진 가정이 많습니다. 온통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키우던 사랑스런 아이들이 반항하고 어긋나 속수무책입니다. 

세월호 유가족처럼, 예상치 못한 환란에 아파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바나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며 사회적으로 출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이 허다합니다. 이렇게 N포 세대라고 불리는 청년들의 불안과 좌절은 크기만 합니다.

건강에 적신호가 오고 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대사회에는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울증 조울증으로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외로움에 힘들어 합니다.>


여러분은 가운데도 이런 저런 이유로 힘들어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런 분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처럼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어주고 그들의 아픈 이야기를 다 들어주며 그들과 동행하여 주는 사람이 아닐까요? 

바로 이것이 주님의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물론 예수님처럼 우리가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도록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서신의 말씀 베드로전서 1장 23절의 말씀처럼 “새로 태어나는 구원과 부활의 사건”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해서 신자들은 마땅히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섣불리 권면한다고 말을 걸다가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말보다 먼저 우선적으로 우리는 아파하고 신음하는 이웃들 “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습니다. 동행할 수 있습니다. 벗이 되어 같이 밥을 먹으며 우정을 쌓아갈 수 있습니다.  


미인대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미소 짓는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인사한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다가가 대화한다. 즉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칭찬하는 사람이다. 즉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 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창립 18주년을 맞이한 우리교회가 예수님처럼, “곁으로” 다가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는 우리 공동체 서로가 서로의 “곁으로” 다가가 미인대칭하며 서로를 일으켜 주면서, 그 힘과 은총으로 우리 주변에 외롭고 지친 사람들, 실패와 좌절로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하느님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 불의한 사회구조로 인해 고통 받고 신음하는 어려운 이웃들 “곁으로” 다가가는 예수님의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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