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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주님 오시는 길

by 분당교회 2015. 12. 6.

주님 오시는 길


유대교 랍비이자 철학자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예언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자는 인간의 마음을 습격하는 자이다. 양심이 끝나는 곳에서 그의 말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예언자들은 신앙과 양심이 굳어있고 영혼이 잠들어 있는 시대에 위정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때로는 핍박을 받기도 했고, 백성들로부터 외면받기도 했고 고통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예언자들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신앙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신약의 첫 번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수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나타나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는 광야의 소리를 외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그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달콤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축복의 선물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편안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선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외친 소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죄인임을 인식하라는 것이고, 회개해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플로렌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 드리는 것과 율법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누가 이스라엘 사람인가?’라고 물으면 ‘이스라엘은 신앙인이다.’라고 답을 하는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제사와 율법을 지키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무였고 그러지 않으면 이방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와 율법은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지 못했고 또 영혼이 담겨있지도 못했습니다. 영혼 없이 드리는 예배를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경멸했는지는 구약의 예언서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우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아모 6:21-24)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제사와 율법만을 내세우는 그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외칩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영적인 각성도 없고, 윤리의식이 마비된 종교인들의 심장을 찌르는 외침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혈통을 이어받은 자기들이야말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 선민의식이라는 것은 ‘책임’을 말하는 것이지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혈통의 계승을 내세우며 이방인들을 차별했습니다.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라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라!


우리는 주님 오시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 먼저 세례자 요한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우리 마음속에 골짜기가 깊이 파여 있다면 메워야 합니다. 마음에 원한이 있고, 미움과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경우입니다. 탐욕과 이기심으로 그 길이 험난하게 되었다면 깎고 눕혀져서 고르게 되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메말랐다면 그 길을 윤택하게 해야 합니다. 약자들에 대한 차별과  강자의 횡포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야만적인 사회라면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이 말하는 회개이고 새로운 역사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희망입니다. 백성들은 요한에게서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보았으므로 그 앞에 나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대림절은 우리가 처음 세례 받았을 때의 그 마음을 회복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말로만 회개했다고 하고서 삶에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또 다른 위선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처럼 행실로 보여지지 않는 회개는 위장된 고백입니다. 주님 오시는 길은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 속에 있습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2월 6일 대림 2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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