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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인물 시리즈 : 윌리엄 러(William Law 1686-1761): 안일한 신앙에 대적한 용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5.

윌리엄 러는 영적 전쟁터에서 안일의 마귀만을 집중해서 대적한 용사와도 같은 인물입니다. 그가 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진지한 소명」(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이라는 책 하나 때문에 사람들은 3세기가 지나도록 윌리엄 러라는 이름을 기억합니다. 1729년에 처음 발간된 이 책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존 웨슬리는 이 책을 일러 “그 표현의 아름다움, 사고의 바름과 깊이를 능가할 책이 없다”고 극찬했으며 C. S. 루이스는 이 책을 읽고 표본에 옴짝달싹 못하게 못 박힌 나비 같은 기분이 들 정도라고 했습니다. 18세기 영국엔 그런 책이 필요했습니다. 나라가 부강해지니까 이전의 신앙적 열정은 식고 사람들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교회는 나름 잘 다니지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합니다. 부자 집안의 둘째 아들은 신앙이 없어도 성직자가 되는 게 관행입니다. 주일날 교회 나오고 점잖게 행동하고 가끔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이나 베풀면 전부라는 식입니다. 당시의 교회란 도무지 도전이라곤 없는 밍밍한 자기만족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안일한 신앙의 놀이터에 윌리엄 러는 「진지한 소명」이라는 수류탄을 던진 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맘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데 「진지한 소명」이 나오기 3년 전에 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책을 쓴 바 있습니다. 두 책 모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하려는 시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이미 신자가 된 사람들을 향해 신앙은 종교적 관습에 선행을 조금 보탠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삶을 온통 드리는 헌신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돈, 모든 관계, 모든 사고와 행동을 다 하느님께 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변화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러가 당시의 성공회를 들여다보니 도무지 그런 신앙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모라서? 러가 보기에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살려고 하지만 연약해서? 더군다나 아닙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의도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풍환자처럼 우리의 의도, 의향이 마비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러는 짚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부록과 같은 것이 아니다, 삶의 보태진 한 부분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닮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임을 일깨운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차라리 이해할 만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애초에 그렇게 살 의도가 없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러는 우리가 얼마나 뜻한 만큼 살았는가로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참된 의도를 품었는가로 심판 받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윌리엄 러는 자기가 쓴 책대로 타협 없이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치룬 대가도 큽니다. 그가 성직서품을 받고 캠브리지에서 석사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앞길이 탄탄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 조지1세에게 충성서약을 거부하게 되는데 앞으로 어렵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했다고 하지요. 그 바람에 러는 제대로 교회에 부임한 적이 없고 평생 강사와 작가로서 생활비를 벌며 근근이 살아야 했습니다. 러 스스로의 말처럼 자신이 “불행보다 더한 것을 두려워할 줄 몰랐다면 비참했을” 시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진지한 소명」으로 좀 유명해진 어느 날 런던의 어느 가게 앞에 서 있는 러에게 낯선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윌리엄 러 신부님이십니까?” 낯선 이가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그는 러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주고 사라졌는데 그 안에는 천 파운드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연봉 삼백 파운드면 괜찮게 쳐주던 시절에 큰 금액이 아닐 수 없습니다. 러는 이 돈으로 고향마을 킹스클리프에 여성을 위한 학교를 짓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고향으로 돌아와 생애 마지막 22년을 거기서 수도원에 준하는 생활을 하며 삽니다. 이 생활에는 신심 깊은 여성 두 명이 동참했는데 러는 그들에게 영적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그 여성들은 수입이 많았지만 90퍼센트 이상을 빈민들을 위해 쓰고 자신들은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 바람에 동네에 거지와 노숙자들로 들끓게 되자 주민들은 러를 마을에서 축출하려 들었습니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상황이 가라앉고 러와 두 여성은 이전처럼 생활하며 여전히 빈민구제에 힘을 쓸 수 있었습니다.

윌리엄 러가 전적인 헌신을 강조하다보니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뻣뻣한 율법주의자라는 것이지요. 교회 내에서 자신이 원했던 삶을 갖지도 못했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주민들과 불편한 관계를 가져야 했지만 러는 늘 행복했습니다. 그가 「진지한 소명」에서 말한 바대로 “늘 뭐가 부족하다고 상상하고 공연히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반역하는 것”이지만 “헌신의 생활 자체가 가져오는 평화와 행복”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러를 뻣뻣한 율법주의자라 비난하는 것은 그의 말년 작품을 보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러는 독일의 농부 신비주의자 야콥 뵈메(Jakob Boehme)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뵈메는 가슴이 따뜻하고 열정적인 영성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인지 러의 글들은 초기나 후기나 주제는 한결같지만 뒤로 갈수록 따스함이 더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초기엔 기도의 기법을 많이 말하고 강조하지만 후기에는 기도의 영을 더 많이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신자의 가슴에 내주하시는 분으로 거듭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무에서 창조된 피조물이기보다 하느님 신성의 영원한 불꽃으로 묘사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소위 “하느님의 진노”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치 못한 죄인의 가슴 속에만 있을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러는 만인구원설을 주장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과연 후기작품에는 그런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도 자신이 받아들여야만 구원으로 작용한다는 점은 분명히 했습니다. 당대의 안일한 교회에 폭탄을 던진 것과 같은 파장 때문에 사람들은 러와 「진지한 소명」을 하나로 묶어 생각합니다. 하지만 윌리엄 러 자신은 이후에 쓴 「기도의 영」(The Spirit of Prayer)와 「사랑의 영」(The Spirit of Love)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초기의 서슬 퍼런 율사(律師)의 모습에서 보다 원만하게 깊이 통합된 자신의 모습이 그 책들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윌리엄 러를 읽노라면 18세기 영국과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윌리엄 러라면 오늘날 대한성공회를 향해서는 무슨 말을 했을까요?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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