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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12월 27일 (성탄 1주일) 강론초 (루가 2:41-5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26.


2009년 12월 27일 성탄 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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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18-20, 26

어린 나이에 야훼를 모시게 된 사무엘은 몸에 모시 에봇을 입고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매년 주년제를 드리러 남편과 함께 올라 올 때 마다 작은 두루마기 한벌을 지어다가 아들에게 주었다. 그러면 엘리는 엘카나 부부에게 "야훼께서 맡기로 하신 이 아이 대신으로  이 부인 몸에서 후손이 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복을 빌어 주었고 이 축복을 받고 그들은 자기네 고장으로 돌아 가곤 하였다.
한편 어린 사무엘은 야훼와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무럭무럭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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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사이서 3:12-17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 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 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여러분 안에 살아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모든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십시오. 그리고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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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복음 2:41-52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예수가 열 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다. 그런데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 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아들이 일행 중에 끼어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으므로 줄곧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 갔다.
사흘 만에 성전에서 그를 찾아 냈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예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듣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 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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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진리의 빛을 밝혀 주셨나이다. 비옵나니,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인 우리가 이 빛을 따라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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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으로 성장하는 삶이 되시길! (루가 2:41-52)

벌써 2009년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정말 쏜살같은 세월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시간의 흐름은 소중한 성장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른이 된 우리들도 시간의 흐름을 그저 나이 들어감 곧 늙어감으로 여기며 한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육신은 성장의 정점을 지나 서서히 쇠퇴하게 되지만 영적인, 신앙적인 성장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근력이 튼실하다는 자랑도 좋지만, 이제 머지않아 돌아가 안길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심전심 알게 되었노라는 고백은 훨씬 더 멋지고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우리들의 남은 여력을 기도와 정성으로 바치리라고 다짐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오늘 복음서는 12살의 어린 예수가 자신이 육으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지만 영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고 계셨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비범한 분이신가를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탄의 의미, 즉 예수님 강생의 의미는 천상의 하느님 아들이 지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가능한 기적적인 능력으로!)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셨다는 이야기가 핵심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참 사람이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라는 신비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비범(非凡)함’은 어떤 기적적인 능력이나 신비로운 성품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신 예수님의  “순수한 인간성, 순종의 자세,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사랑의 실천”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5살에 작곡을 시작한 신동이라는 식으로 소년 예수님의 비범함을 기리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성장과정을 겪으셨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을 통하여 성장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예수님과 우리는 같은 입장입니다. 종교적인 깨달음, 깨우침은 우연히 벼락 맞듯 체험하고 얻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급작스러운 일로 보일지라도 실은 일종의 성장과정, 구도와 수행의 과정을 충실히 감내한 결과로서의 열매입니다. 또한 신앙인의 삶의 목적은 홀로 이루어내는 업적이 아니라 무수한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격의 성숙임을 기억할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소년 예수와 똑 같은 ‘인간’임을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어린 예수가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한 그 대답이야말로 바로 우리 모두의 영적인 고백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깊이 신뢰하는 믿음! 예수님은 그 믿음으로써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일생 우리 주 예수님을 닮아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00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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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인생 (루가 2:41-52)

어느덧 2006년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참으로 빠른 시간의 흐름!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우리가 변해간다는 것이고 무엇인가를 경험하며,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음을 뜻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으며 무엇을 배웠고 또 어디를 향해 살아가고 있던 것일까요?

오늘의 복음서는 12살의 어린 예수가 자신이 육으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지만 영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비범한 분이신가를 전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과연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들 보통 인간과 다른 특별한 존재인가를 드러내려는 의도로만 쓰여진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런 관심을 가지고 읽어야만 신앙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가령 성탄의 의미, 즉 예수님 강생의 의미는 천상의 하느님 아들이 지상에 인간의 탈을 쓰고 와서 얼마나 놀라운 ‘쇼’를 보여주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데 신약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비범(非凡)함’은 어떤 기적적인 능력이나 신비로운 성품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 드러나는 “순수한 인간성, 순종의 자세,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사랑의 실천”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우리는 마치 모차르트가 5살에 작곡을 시작한 신동이었다는 식의 예수님 어릴 적의 영웅담에 감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성장과정을 겪었다는 점을 더 아름답게 여기게 됩니다. 오늘 복음서의 장면은 말하자면 예수님의 사춘기 즈음에 일어난 일이라고나 할까요^^?
중요한 것은 비록 아직 어린 예수이지만 이미 스스로의 존재를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는 과연 어떠한지요?

다시금 우리 인생을 돌아봅시다.
인생은 시간의 흐름 위에 나면서 죽기까지 실려가면서 욕망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남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는 일에 골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시간이라는 형태로 허락되어진 생명입니다. 시간은 곧 우리의 변화의 가능성입니다. 우리가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면 백년 천년의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생은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나면서 죽기까지 어떤 변화를 이루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떤 힘으로 변화합니까?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으로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변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 처럼 변화합니다.

자녀들의 교육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얘야,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남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지려고, 남보다 인정받는 삶을 살려고 애썼고 그래서 많은 것을 이루었다. 그래서 정말 행복하단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지. 너도 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남보다 부자가 되고 남보다 출세를 해야 한다.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법이란다.”
 이것이 우리가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교훈일까요?

“얘야, 나는 일생을 진지하고 성실히 살려고 노력했다. 부자도 못되고 권력을 가져본 적도 없지만 내가 맡은 일에 나는 최선을 다했고 최고가 되려고 했다. 무엇보다 나는 일생의 기쁨과 고통 가운데 하느님을 잊어본 적이 없다. 인생의 행복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데 달려있단다. 그 분은 늘 자비롭고 은총을 베푸시어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끄시고 늘 새로운 기회를 주시지. 네가 하느님을 뜻을 따라 다른 사람들 사랑하며 산다면 너는 진정 복된 인생을 사는 것이란다.” 
저는 이렇게 말해주는 이라면 훌륭한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깨달음, 깨우침은 우연히 벼락을 맞듯 체험하고 얻어낼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성장과정, 구도와 수행의 과정을 충실히 감내한 결과로서의 열매입니다. 신앙인의 삶의 목적은 홀로 이루고 쌓는 어떤 업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의 성숙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와 똑 같은 ‘인간’임을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그러므로 어린 예수가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한 그 대답이야말로 바로 우리 영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깊이 신뢰하는 믿음!
예수님은 그 믿음으로써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고 우리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신분으로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생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2006.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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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거룩한 삶

오늘의 복음서에서 12살의 어린 예수는 자신이 육으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지만 영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특별한 분이신가를 전하려는 이야기일 터이지만 실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육으로는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지만 영으로는 하느님께 속하여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서 삽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육으로는 사람으로 모습을 취하셨지만 영으로는 온전히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무슨 의미일까요? 신화적인 표현일까요, 아니면 과학적인 진술일까요? 어디부터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입니까? 무엇이 육이고 무엇이 영일까요? 잘 새기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 땅은 공간이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신 차원이 하늘이고, 우리가 사는 차원이 땅입니다. 몸이 곧 육이고 정신이 곧 영인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속하는 것, 하느님과 통하는 것이 영이고 사람에게 속하는 것, 사람에게 제한된 것이 육입니다. 거룩함과 속됨이라는 개념이 하늘과 땅, 영과 육을 더욱 잘 이해하게 해줍니다. 하늘은 거룩하고 땅은 속됩니다. 우리는 속된 땅에서 하늘의 거룩함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속되게 살지만 거룩하기를 원하는 이들입니다. 불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 성탄의 신비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헛되지 않게 합니다. 우리와 같은 몸으로 오신 예수는 이 속된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우리도 예수님 을 뒤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비결은 바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깊이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으로써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고 우리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탄을 기뻐하고 찬양합니다! (200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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