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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자기 십자가

by 분당교회 2015. 3. 7.

자기 십자가


십자가는 구원과 은총의 상징이지만 원래는 죄수들의 사형방법이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인들이나 노예들 중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에 대해서 가장 극악한 형벌로서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십자가형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고상을 통해 보듯이 나무 기둥에 죄수의 양팔목과 발목을 못으로 박아 고정합니다. 이때 무릎은 약간 구부려진 상태로 여유를 줍니다. 이것은 양팔로만 지탱되는 몸이 서서히 밑으로 쳐지면서 횡격막을 압박하여 숨을 쉴 수 없게 되면 다시 구부러진 다리를 펴서 올라가 호흡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 합니다. 얼핏 보면 목숨을 연장시켜주도록 하는 배려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더 서서히 고통을 받아 숨지게 하려는 잔인한 배려일 뿐입니다. 뜨거운 광야나 돌산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피가 마르고 목마르고 외롭게 죽어가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잔인한 형벌의 도구를 우리가 구원과 사랑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긴 것을 우리는 구원의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희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서 인류의 죄가 씻어지게 되었다는 소위 ‘대속’의 교리가 전통적인 가르침으로 교회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약간 염치없이 ‘값싼 은총’을 기대하는 신앙이 숨어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희생제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 시대에 사람들이 속죄를 얻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을 봉헌해야 하고 이 제물이 피 흘리며 죽을 때 봉헌자의 죄도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김을 받는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이것이 요식행위처럼 행하여지고 오히려 죄의식 없이,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는 ‘값싼 은혜란 회개가 없는 사죄요, 교회권징이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의 참회가 없는 용서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요, 인간이 되고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말씀에 반기를 든 베드로를 엄중히 문책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과 은총의 상징으로 여긴다면 우리의 삶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결단과 신앙이 없이 십자가만 바라보며 은총과 축복을 구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며 은총을 싸구려로 만드는 일입니다. 십자가가 장식물이나 엑세서리의 의미를 넘어서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은총을 값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모든 고통이 십자가의 고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답시고 진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세우기도 한답니다. 이것은 의미 없는 자학이고 자위행위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진리와 평화와 사랑의 복음이 없고 단지 자기가 예수처럼 해봤다는 자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모진 고생을 겪는 것을 십자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운동선수가 자기 성취를 위해서 고된 지옥훈련을 감당하는 것을 보고 십자가의 고난을 겪는다고 말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졌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적어도 십자가를 짊어진다고 할 때는 자기중심의 울타리를 넘어서 보다 높은 가치와 진리를 위해 희생할 때, 이웃의 생명과 행복을 위해 사랑의 고통을 당할 때 십자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을 의도한 사람도 있고, 의도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죄 없는 희생자들이 수없이 많이 있어왔으니까요.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으니 아마도 우리에게는 각자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따로 있을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 하느님의 진리와 복음을 위해서, 영적인 진보를 위해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실천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큰 보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3월 1일 사순 2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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