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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숨어있는 제자

by 분당교회 2014. 3. 17.

숨어있는 제자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3월 16일 사순 2주일 설교 말씀)

예수님을 추종하던 사람들 중에 니고데모는 매우 특이한 사람입니다. 그는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약간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주시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두고 ‘숨어있는 제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님한테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바리사이파 중의 한 사람이며 당시의 의회의원인 고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대부분 당시 사회의 밑바닥 층 사람들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니고데모는 그들과 어울리기에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리마태아 요셉과 예수님의 장례를 치룬 인물입니다.(요한 19:39)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제자들은 다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를 지키고 값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시신을 모셨다는 것은 니고데모가 얼마나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추종했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유독 요한 복음서에만 등장하는 니고데모가 처음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는 밤중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그가 아직 어둠에 머물고 있었던 탓이라 합니다. 깨달음과 믿음이 없는 어둠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바리사이파이고 고관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면 그의 사정이 밤에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한낮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유다인들의 지도자인 그가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온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아직 대놓고 예수님을 추종한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왜 그렇게나마 예수님을 찾아 올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 답은 예수님이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궁금한 점이기도 하거니와 절실하게 갈망하는 것을 처음에는 숨겼습니다. 예수님께 처음 질문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이상한 공치사였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문은 무시하고 아예 그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듯이 그가 원하는 답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즉, 니고데모는 영생과 천국에 대한 의문과 갈망이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잣대로 볼 때 그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으로도 찾을 수 없기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런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세세하게 답을 해주십니다. 

니고데모가 거듭난다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다기보다 의문이 많았습니다.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한다는 자체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오히려 아무런 질문도 없고 회의와 도전도 없이 그저 당연하다는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 더 깊은 깨달음과 믿음의 길로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후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으나 니고데모가 율법을 근거로 해서 체포할 수 없다는 변론을 하는 장면에서 두 번째로 등장합니다.(요한7:50) 어느 새 그는 예수님 편에 선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의 장례 때 등장한 것입니다.

신앙은 변화되어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때 니고데모의 변화는 매우 조심스럽고 천천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베드로 같으면 일순간에 따라나섰다가 예수님한테 핀잔도 듣고 배신도 하면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순교를 하는 케이스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매우 극적으로 변화된 경우이고요. 이처럼 변화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바울처럼 극적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매우 천천히 의문을 하나 둘씩 해소해 가면서 변화된 경우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꾸준하고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관심의 방향이 올바르면 결국에는 목표에 도달하게 됩니다. 니고데모의 관심은 처음부터 영생과 천국에 있었으며 그 길은 예수님만이 아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외쳐도 관심의 방향이 엉뚱하고 잘못되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전철 안에서 소리 지르며 남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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