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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대성당의 살인

by 분당교회 2013. 12. 29.

대성당의 살인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2월 29일 성탄후 1주일 설교 말씀) 


오늘은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이자 토마스 베케트의 순교 축일이기도 합니다.
 

12세기 초에 교권과 속권이 대립하는 역사적 배경에서 영국왕 헨리 2세가 기사들을 시켜 켄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베케트를 대성당에서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천재 시인 T. S. 엘리어트는 1935년에 ‘대성당의 살인’이라는 시극에 이 순교 사건을 드라마로 만들어서 켄터베리 축제에 연극으로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어트가 이 작품을 쓸 당시는 공산주의, 파시즘의 등장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서구 문명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어트는 물질주의, 독재정치, 자유방임주의 등으로 서구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왔던 기독교적 가치관과 질서가 무너지는 영적인 암흑이 오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재건만이 서구 문명의 앞날을 구하는 유일한 진로라고 여겨 순교자의 죽음과 대중의 영적 각성을 드라마로 만든 것입니다. 

작품 속에서 대중들은 초반에 대주교가 나타나서 자신들의 안일한 생활이 침해 될까봐 염려합니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으시면 좋으련만. 왕과 귀족이 통치하는 땅, 우리는 여러 모양으로 고난을 겪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대로 살아 왔다. 해결점을 찾으며 홀로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상인은 조심스레 재산을 모으려 힘쓰고, 노동자는 자기 땅뙈기에 허리를 구부린다. 차라리 눈에 띄지 않고 살기를 원하노라. 이제 고요하던 계절들이 동요될까 두렵구나.’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길 원치 않습니다. 칠년간 우리는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눈에 띠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조각난 삶이지만 살아왔습니다.’

토마스 베켓 대주교가 순교한 자리 (캔터베리 대성당)

대주교는 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돌아와서 네 명의 유혹자들을 물리칩니다. 어린 시절 왕과 함께 놀았던 쾌락, 왕이 허락했던 권세, 지주들과의 야합에 대한 유혹을 단호히 물리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유혹자는 순교의 유혹을 권합니다. 세상의 권세는 이 지상에서만 한정적으로 누릴 수 있지만 하늘나라의 권세는 영원할 뿐 아니라 세상의 왕도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케트 대주교는 그 유혹이야말로 가장 교활한 유혹이라 하며 물리칩니다. 그리고서는 순교를 예감한 성탄절 설교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동시에 십자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역설적이고도 모순된 상황에 대해서 말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 바로 다음 날은 최초의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축일이고 다음 날인 27일은 성 사도 요한. 28일은 죄 없는 어린이들의 순교일입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교회력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기뻐하면서 슬퍼하는 역설의 표현이라고 엘리어트는 베케트의 설교를 빌어 말하고 있습니다. 순교는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고로 그들을 경고하고, 인도하고, 그들을 하느님의 길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참다운 순교자란, 하느님의 의지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도 열망하지 않는 자를 말하며, 또한 그는 순교자가 된다는 영광, 그것 자체마저도 열망하지 않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자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대중들의 코러스에서는 순교자의 무덤 앞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영적인 회개와 각성이 일어남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보혈의 자비와 사랑과 구속에 감사합니다. 당신의 성자와 순교자들의 보혈이 대지를 풍요롭게 하며, 성스러운 장소들을 창조해 줍니다. 성자가 산 곳은 어디든지, 순교자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위해 피 흘린 곳은 어디든지 그곳은 성스러운 땅이 됩니다. ... 감사를 드리나이다. 주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하느님의 축복을, 하느님의 밤의 고독을, 요구되는 항복을, 겪어야 될 박탈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보다 인간의 정의를 두려워했습니다. ...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죄 없는 사람들의 순교가 안일한 침묵에 숨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웁니다. 그리고 다시금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에 감사하고 새로운 삶으로 전환합니다. 죄 없는 아이들이 학살당한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학살의 비극이 만들어지는 죄악의 세계를 선한 세계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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