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모어는 한창 때 런던의 살롱가를 주름잡으며 패션을 주도하고 문학이나 예술을 농하는 상류사회 사교계의 총아였습니다. 가볍게 글도 잘 써서 모어가 쓴 극은 유행을 이끌었고 사람들은 이 재기발랄한 여류작가를 찬양해 마지않았습니다. 당대 명사들과 염문을 뿌리기 일쑤였으니 앞에서 소개한 새뮤얼 존슨도 한나 모어를 열렬히 떠받들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귀부인들은 모어에게 “당신은 패션 그 자체요!” 하고 찬사를 늘어놓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사교계의 멋쟁이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무렵만 해도 한나 모어의 세계관은 지극히 보수적이어서 사람들의 사회계급이 다른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안정, 질서, 구조야말로 영국적인 방식이고 당시 프랑스처럼 공연히 혁명이니 어쩌니 하면서 사회질서를 흔들어봐야 유혈과 혼란만 불러오지 않느냐고 비판한 것이 모어였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참고 복종하며 열심히 일하며 사는 것이 본분이라고 말하곤 했다지요. 여기까지 봐서는 성공회가 신앙의 인물로 한나 모어를 기억할 까닭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신앙은 관두고 도무지 반동적인 상류층 귀부인 하나에 불과했을 한나 모어의 인생은 서서히 반전됩니다. 다섯 자매의 둘째로 태어난 모어는 다들 나름 지적이고 똑똑했던 자매들 중에도 유난히 총명했다고 합니다. 이 다섯 자매가 힘을 합쳐 브리스톨에 세운 학교는 질 좋은 교육을 하기로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다섯 자매가 모두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만, 한나 모어는 브리스톨 시절 윌리엄 터너라는 사람에게 세 번이나 청혼을 받고 세 번 수락하지만 세 번 다 불발로 끝납니다. 이 터너에게 모어는 상당히 빠져 있었던 모양으로 그와 결혼하려고 자매가 세운 학교까지 그만 둡니다. 하지만 결혼 날짜가 다가오면 파혼해 버리는 터너의 행각에 모어는 적잖이 상처를 받았고 이후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이후 여러 차례 청혼을 받지만 다 거절했다고 하니 이때의 경험이 한나 모어에게는 상처의 화인(火印)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 상실의 경험이 조용히 세계관을 붕괴시키고 내면적 변화를 일구는 계기가 되지 않더냐 하는 뜻에서 말입니다.
한나 모어는 나이 서른 무렵부터 런던에 가 몇 달씩 지내는 습관이 생겼는데 여기서도 빼어난 말솜씨와 유머감각으로 사교계를 주름잡습니다. 하지만 주위사람들과 모어가 다른 점이 하나 있었으니 모어는 교회를 다녔던 것입니다. 런던의 상류사회는 그리스도교는 당연한 문화의 한 요소 정도로 가볍게 취급했고 머리 중심의 신앙으로 일상생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무엇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나 모어는 나름 진지한 신앙적 태도를 견지했던 터였는데 1787년 마흔 둘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윌버포스가 노예제 폐지운동 하는 것을 지지하면서 모어도 상류층에게 신앙을 머리로라도 끄덕여 동의했다면 이제 생활로 실천해야 할 게 아니냐고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하류층 앞에 모본을 보여야 할 상류층의 책임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지요. 신앙을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예 신앙이 없는 이들보다 교회나 사회에 문제라고 모어는 말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란 의향이고 습관이며 기질이다, 명목만이 아닌 본성에 관한 것으로 온 마음을 하느님께 모으는 것이다”라고 써대는 모어에게서 한 세기 전 윌리엄 러의 사자후를 듣습니다. 이 무렵 한나 모어가 내놓는 신앙적 도전의 글들도 꽤나 반향을 일으켜 널리 읽히지만 개중에는 도대체 이 매력적이고 재치 있는 사교계의 여왕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한나 모어가 노예제 폐지운동에 관여하면서 신앙을 진지하게 대하면서 일상생활 및 사회적 차원에서도 신앙적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글을 통해 신앙생활과 윤리적 행동을 설파했는데 모어 자신은 빈민층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지만 정작 그 글을 사서 일고 퍼뜨린 사람들은 먹고 살만한 중산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빈민층에 어떤 실질적인 영향력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글쓰기보다 의미심장한 모어의 신앙적 실천은 실질적인 행동에 있습니다. 1789년 윌버포스가 브리스톨 인근에 사는 모어 자매들을 방문했다가 체다 지역의 유명한 동굴관광에 나섭니다. 하지만 윌버포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동굴이 아니라 지역빈민들의 참상이었습니다. 공업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예전의 교육시스템은 죄다 붕괴하고 빈민층에겐 아예 교육의 기회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윌버포스의 눈에는 그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윌버포스는 모어 자매들에게 체다 지역을 위해 무언가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거기 응답해 작은 학교를 여기저기 세우기 시작합니다. 특히 한나 모어가 보기에 빈곤층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 아닌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커리큘럼에는 성서와 기도생활을 통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소개되도록 했습니다. 한나 모어는 진흙탕에 가까운 벌판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학생들을 모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노예가 제 격이라는 지주들,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성직자들, 무능하며 질투만 하는 교사들, 의심쩍게 바라보는 부모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모어는 늘 예의바르고 친절한 태도로 이들을 대했으며 마침내 체다 지역에서만 5백이 넘는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체다 뿐만 아니라 인근에도 비슷한 크기 학교가 두 개나 더 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세 학교는 십년 남짓 버티다가 문을 닫았던 모양입니다. 이것을 모어는 다 자기 겸손이 부족한 탓으로 돌렸습니다. 찬양이나 명성을 잘 활용하는 법을 몰라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지요. 여하튼 한나 모어는 자기 인생이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한나 모어의 최고 역작들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1808년에 쓴 Coelebs in Search of a Wife라는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이 소설 안에서 신앙의 온갖 주제들을 토론하는 복음주의 가정이 등장하고 등장인물들은 모어를 대신해서 영적인 관점과 지혜를 쏟아놓습니다. 이어 모어는 1811년 Practical Piety, 1812년 Christian Morals, 1815년에 Practical Writings of St. Paul 등 영성생활의 역작들을 쏟아냅니다. 이 책들을 통해 한나 모어는 논쟁적인 주제는 애써 피하면서 매일의 생활을 그리스도인답게 실천적으로 사는 문제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 중심에 모실수록 얻게 되는 기쁨을 말합니다. 일상성의 예찬, 매일을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실천적 차원에의 집중이란 그대로 성공회적 영성이라 해도 좋을 무엇입니다. 그리고 본인은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사회적 계급을 무시한 보편적 교육의 실시 등은 후대에도 모어가 미처 예기치 못한 사회적 파급력을 갖는 모본이었습니다. 왜 한국의 소위 복음주의자들은 윌버포스나 모어 같은 사회적 책임감과 행동이 약한 건지 새삼 생각해 봅니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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