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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나눔

(옮김) 공동선 통권 89호【대화】『 기도 祈禱 』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2. 12.



원문보기:  http://www.comngood.co.kr/article_view.htm?selected_no=709

분당교회 관할사제로 새로 부임하는 이주엽(프란시스)신부님이 참여한 대담을 옮깁니다.
[공동선]에서 주최하였는데 주제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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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기도 祈禱

이주엽 신부: 노숙자 쉼터, 살림터 소장, 성공회대에서 강의.
지관 스님: 김포 용화사 주지, 불교항쟁연대 집행위원장
최대광 목사: 정동제일교회 부목사, 사회

최대광(이하 사회): 오늘의 주제는 기도에 관해서입니다. 토마스 몰튼은 “명상, 기도나 선
禪의 수행방식에 있어서 불교에 비해 기독교가 훨씬 약하다, 불교로부터 많이 배워야 된
다”고  말합니다. 율리앙 저스틴은 기독인의 선Christian Zen, 이런 걸 만듭니다. 선禪이
라는 것이 불교에만 독특하게 있는 게 아니고 왜 기독교에서는 할 수 없느냐고 얘기를 합
니다. 하지만 사실은 불교로부터 배워야할 게 많죠. 이 신부님께서 기독교, 특히 성공회에
서 얘기하는 기도가 뭔지 말씀해 주시죠.

이주엽: 신·구교의 모습을 다양하게 가진 성공회는 기도에 관해 특별히 전통을 따로 가지
고 있다기보다 가톨릭, 개신교의 기도전통에 뿌리가 내리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
는 불교가 명상이라는 것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가고자 한다고 이해하고 있으며, 기독교에
서는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향해 기도를 드려서 신과 합일合一하는 것, 하나가 되는 것
을 겨냥하고 있다고 이해를 하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다고 하잖아요? 굉장히 일인칭적인 영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지혜가 강조되고 그 지혜
를 통한 깨달음으로서 초월이 되는데 기독교는 신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나 헌신 등 애정
을 강조하면서 신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서 불성과 하나가 되는 구조로 대비된다고 봅니다.

지관: 불교에서는 대승불교가 대중들과 결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기도가 의미를 갖게 됐

지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를 초기 불교, 또는 원시불교라고 합니다. 인도인들은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면 자기의 죄업을 씻을 수 있다고 믿었죠. 거기에 대해서 부처께서 말씀
을 하셨지요. “만약에 누구든지 갠지스 강에서 씻고 죄업이 없어진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
겠느냐”는 거죠. 그 당시 인도인들은 속죄의 바램을 목욕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절대자에
게 기도를 한 것이죠. 하지만 부처께서는 참회와 용서 받음을 역설하신 것이죠. 그래서 부
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신부의 말씀처럼 불
교의 말씀의 핵심은 진리를 깨달아서 누구든지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
반을 하신 이후 제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신도들도 부처님과 함께하고 싶은 열망이 석가모
니 부처님의 상징으로써 탑을 조성하고 탑의 유골을 모시는 사리탑을 짓고 모여서 예불하
고 찬탄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신격화하는 신앙으로까지 발전이 되는 거죠. 부처님 말씀
은 끝없는 성찰과 진리에 대한 실천을 통해서 부처가 되는 것인데 부처님 열반하시고 갈
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출가제자들이 실천행인 수행修行과 명상을 통하여 성불하는 것
이죠.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는 절대자의 은혜와 가피력加被力을 입어 내 욕망을 이
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기도라고 봅니다. 출가제자와 일반신도들의
수행은 우열의 측면이기보다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죠.

이주엽: 스님께서 불교에서의 수행은 이원화되어 출가제자들은 명상과 수행을 통한 깨달

음, 불성으로 가는 게 목표고 일반신도들에서는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써 절대자에게 기대
는 것이 기도라고 말씀하시는데 만약에 이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불교를 절대자에
게 기대어 소원 성취로써의 기도만을 아는 그런 종교로 볼 수도 있다고…….

지관: 그래서 우리 불교는 말이죠, 흔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력불교自力佛敎와 타력불
교他力佛敎. 자력불교라는 것은 실천행인 수행修行과 명상을 통하여 철저한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 속에서, 거기에 대한 실천을 통해서 스스로가 정말 부처와 같은 경지, 부처
가 되는 것이죠. 완전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은혜와
가피력을 입어서 절대자에 의지하는 거죠.

사회: 불교에서는 출가제자와 일반신도들의 수행은 이원화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기독교

에서는 깨달음과 기도라는 형태가 한 개인이나 개 교회에게서도 섞여 있다고 보이는데 여
기에 대해서 이 신부께서 말씀해 주시죠.

이주엽: 사실 기독교 내부에서도 견해가 차이가 나고 견해의 차이가 너는 이렇고 나는 이

렇다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고 죽이는 경우도 있고 중세에는 화형에 처하는 식의
증오심과 공격성을 보이기도 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런 표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심층에 있어서는 굉장히 일치된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고 놀라울 정도로 보편성을 보인다
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헉슬리의 영혼의 철학을 읽은 후였지요. 석가
모니 붓다라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를 창안하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대가
흘러내려오면서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이 그들을 신격화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교리
를 만들고 종교가 완성되게 되는데 이 와중에 등장하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는 불교 신자들의 의외로 많아요. “난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주위에서 상당히 세
련된 사람으로 받아들여요. 그 사람들한테는 우리 한국에서 보는 기복적인 불교가 엿보이
지 않아요. 오히려 이들은 명상을 통해서 자기 안에 참 나로써의 불성을 깨닫고자 하는 목
표를 갖지요. 일반 신도의 기복적인 모습에 대해서 비난하는 게 맞는 건지, 인간은 원래
연약한 존재니까 그런 심성이 발현되는 것도 당연할 수도 있지요, 절대자에 기대어 간다.
기독교의 경우에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지요. 기도를 일반적으로 절대자에 기대어 소
원성취를 위해 비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 영성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관상이라
는 것이 있는데 이를 목표로 잡아본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이런 면에서 보면 개신교의 역
사가 좀 이례적이긴 합니다. 관상은 크게 봐서 두 가지 갈래가 있어요. 기독교를 플라톤
철학으로 설명해 버릇했기 때문에 플라톤에서 관상이라는 말이 나오죠. 관상이라고 하는
것을 말 그대로 합일이거든요.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의 구별이 사라져버리거든요. 하
나로 합일되는 것이 굉장히 비논리적인 것일 수도 있죠. 사실 이론적으로 보자면 굉장히
유사해요. 불교에서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가 중생으로써 동시에 붓다가 되는 것처럼 기독
교도 관상을 통해서 영혼이 자기를 감각계의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알았다가 자기 본래의
신성으로, 물론 플라톤이 신성이란 말을 쓰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
미를 하거든요. 관상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교의 영성의 목표로 말을 할 때는 사실 좀 미묘
한 게 있는데 하나는 동방정교 같은 곳에서는 기도의 목표를 신화神化, 신처럼 되는 것이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이 본래 신성한 거죠. 그러니까 영혼은 신과 동
족 관계에 있었던 건데 그게 영혼이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신성
을 다시 이렇게 회복하는 것이 영성의 목표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서방교회가 정통 신
앙을 확립하는 시점을 325년 니케아 공회로 봅니다. 공회에서의 논쟁에서 동방정교의 입
장이 패하면서 기독교가 기도 생활, 수행이라는 표현을 잘 안 쓰고 수도 생활을 목표를 신
처럼 되는 것이라고 표현하지를 않거든요. 거기에는 “건널 수 없는 존재인 신은 있다.” 이
런 식으로 얘기를 합니다. 불교같이 속 시원하게 “우리가 붓다 되는 거야.” 이렇게 얘기하
지 못하는 면이 있죠. 어쨌든 관상의 목표는 신과 하나가 된다, 하나님과 일치한다, 혹은
합일된다. 이런 목표를 얘기를 하지, 소원성취 등의 기복적인 것들이 그리스도교의 영성
생활의 목표로 정당하게 혹은 합법적으로 제시된 적은 없어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기복적
인 측면이 지배적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기도라는 것을 어찌 보면 신을 예배하고 찬탄한다
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소원 성취가 중심에 있어요. 한국 기독교의 영성의 역사는 많이 불
행한 거죠.

사회: 한국의 개신교가 신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비워나가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

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형태로 기도를 하여 신을 축소시키고 우상화 시키고 욕망에 응답
해주는 존재로 생각하는. 완전한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데요. 왜 그럴까요?

이주엽: 세계적인 종교들의 영적인 지혜의 전통들이 서로 쓰는 용어와 문화적 틀이 다름

에도 보편적인 내용들이 등장을 하죠.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하죠. 불교에서 기독교는 타력신앙他力信仰이고 불교는 자력신앙이
라고 하는 데 위빠사나에서는 무상공부, 무아無我를 얘기하는데 그러면 대체 누가 자기
힘으로 그것을 성취했다고 하죠? 내가 지금은 깨달았다라고 해도 여전히 나가 있잖아요.
깨닫기 이전의 나가 여전히 있잖아요. 기독교의 영성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강조하고. 불
교는 지혜를 강조합니다. 이런 차이점이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존재합니다. 기도를 소
원성취로써의 수단으로 대중적인 차원에서 제시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사실 신과의 합
일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죠.

지관: 감정, 생각들을 다 비워 내어버리는 상태가 무상 공부의 목표지요. 무량수경에 보

면  열두 가지 관상법이 있는데 관상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탐貪·진嗔·치癡, 
욕심과 쓸 데 없는 감정들, 또 잘못된 생각들을 비워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청정하고
피해 없는 가운데서 붓다의 경지에 들어가는 그런 수행법들이라는 거죠. 기도가 일방적으
로 절대자에게 의지하여 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문제라는 것이죠. 석가모니 부처님
이 깨달은 자의 눈으로 주변의 인도인들의 모습을 봤을 때 너무 어떤 주·종, 상·하의 개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너무 자학하고, 포기하는 모습과 무조건 미래지향적인 ‘에이, 지
금은 이렇지만 다음에는 좋게 태어나겠지. 좋겠지’ 이런 모습에 대해서 당신께서는 철저
하게 경계를 하셨고 “이 세상의 모든 주인공은 나다. 행복과 불행의 주체는 나이며 천당
가고 지옥으로 가는 것도 나다”라는 기존의 인도인들의 사상에 절대적인 반기를 드는 혁
명적인 선언을 하셨죠. 하지만 세속적인 욕망 성취를 떠날 수는 없다는 거죠. 급한 사람들
에게는 근본적인 해결책보다는 이 문제를 해결을 해야 되는 차원에서 절대자에게 의지하
고 싶고 기대고 싶은 게 민중들의 가장 소박한 욕망이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기도하며 절
대자에게 의지하여 타력적인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불교에서
는 불성과 철저하게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
이 바로 어떤 일상적인 그런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명상과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얻어 대
중들과 나누는 것이죠.

이주엽: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봤을 때 신을 절대라고 하잖아요. 신을 절대라고 하는

‘제2가 없는 1자다’ 라는 이런 표현이 있거든요. 절대와 상대로 이해하는 양극화 할 수 있
는 것은 이미 절대가 아닌 것이죠. 이게 절대를 바라보는 어떤 또 다른 제2의 어딘가에 자
리가 있어가지고 이게 절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절대가 그 순간은 사실 절대
가 아닌 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 ‘신이 유일하시다’ 이런 것은 요즘 개신교에서
용법을 보면 사실은 기독교 신자들이 믿기로 그만 못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경쟁 상대
가 되는 다른 신들이 있어요. 부처도 있고, 알라도 있고… 그런 신들이 있는데 내가 이 많
은 신들 중에 이것들은 다 못하고 내가 우리 신이 최고야 내가 이 여자만 제일 사랑해 뭐
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유일 신앙인 것처럼 말을 하는데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서 유일신을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해본 적이 없고 유일자는 말 그대로 일자라고 하는 것 입
니다.
원래 플라토닉 철학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정립에 굉장히 영향을 준 위디오니스라든
지 플로티노스라든지 그런 신 플라토닉 철학에서 1자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전체 모든
것을 다 담은 그래서 그 1자가 무수히 많은 이 모습으로 자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
처럼 되어 있지만, 스님 앞에서 불교 이야기를 하려니 민망하지만 ‘공즉시색 색즉시공 은
색이란 무상하다, 그래서 공에 집착해도 안 되고 공과 색이 둘이 아니고 사실은 불이고 그
중에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체의 열반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제 귀에는 그게 굉
장히 기독교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관: 김포에 친한 목사가 계시는데 그 분이 권사, 집사와 3주 전에 용화사에 오셔서 점심

으로 비빔밥을 잡수시고 저랑 차 마시면서 이야기를 한참 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목사는
잘 통하니까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권사와 집사는 잘 모르시니까 무슨 말
끝에 “저는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어요. 그 분들이 깜짝 놀라
요. “앉으나 서나 항상 저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제
가 말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님’ 이라고요. 그리고
저는 “그 분을 주님이라고 합니다. 나의 주인, 나는 그 분의 종”이라고 말씀을 드리니 그
분들이 가만히 계세요. 내가 모시는 주인님, 내가 모시는 주님, 내가 종으로 살아갈 수밖
에 없는 그 님은 어떤 님이냐 ‘진리 님’이고 진리 님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다, 절대로
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 밖에 없는 그 님을 막 부르기가 송구스럽고 막 부르기가 미안
하니까 그냥 선생님, 누님, 아버님 하듯이 님자를 써서 존칭을 써서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
는 것이고 그러니까 교회 가도 성당에 가도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제자입니
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죠. 기도라는 말 속에
는 갈망, 갈구, 소원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불교에
서 늘 하는 네 가지의 갈망이 있습니다. 일반 신자들의 공통된 네 가지 큰 서원을 우리는
사홍서원이라 합니다.
 첫째,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일체의 중생, 즉 생명체를 구제하기 위하여 깨달
음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겠다는 맹세.
 둘째,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다함이 없는, 인간의 그 많은 번뇌를 끊겠다는 맹
세. 셋째,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광대무변한 불타의 가르침을 모두 배워 깨닫겠
다는 맹세.
넷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가장 존귀하고 그 이상 뛰어난 것이 없는 불도를
닦아 깨달음에 이르러 성불하는 것인데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가 하나님이 되어야 되고
진리와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기도라고 하는 그 의미가 개인의 소박한 소원 성취를 위한 일종의 기복의 형태로 가
는 기도냐 아니면 정말 사홍서원처럼 나와 절대자가 하나가 되고 내가 부처가 되고 모든
중생들이 하나를 안아서 가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나와 부처가 둘이 아닌 그런 마음속
에서 소원을 담아서 가는 그런 기도냐. 이게 좀 약간 차이가 있는데 결국 그것은 제가 처
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출가수행자들이 가지고 있어야 될 그 소원 기도의 마음이 곧 사홍
서원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우리 개개인 일반인들, 세속인 또
는 지금 급하게 해결해야 될 소원을 가진 분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다할지라도 이것은
좀 뒤에 가고 먼저 해야 될 일들이 있으니까 그런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겠는가 합니다.

이주엽: 사람들이 종교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으면 부정적인 의미에서 신비주의라

고 하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소리를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대학 1
학년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이든지 어떤 분야이
든지 크게 봐서 세 가지의 요소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는 가르침이 있어야 되고 예를 들면
천문을 관측을 해도 망원경을 대고 어떤 각도로 보면 어떤 별이 보인다고 가르쳤더니 그
가르침을 따라서 망원경을 그 각도에 따라 봤더니 실제로 그 별이 보이더라. 그러면 내가
본 이 별이 네가 본 그 별이 맞느냐는 경험의 대조와 비교를 폭넓게 해서 검증반증이 가능
하고 크게 봐서 이 세 가지 요소가 있으므로 해서 가르침이라는 것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믿을만한 것이 되는 것이고 종교에 있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며, 내가
불교의 길을 가지 않아 모르겠지만 거기서 어떤 길을 가르치고 거기서 근본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견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소위 말하는 먼저 깨달았다
라든지 선지식 철학을 통해서 검증받는 이런 시스템이 있는 것으로 보이더라.” “이래도
이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하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비슷한 얘
기로 기독교에서도 사실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체험이 있는데 기독교
가 제시하는 수행할 때는 쓰지는 않지만 어쩠든 그런 길을 가면 결국은 그 체험에 도달하
고 공동체가 그것을 검증하고 이런 시스템이 있는 건데 그랬을 때 기도라는 것이 첫 번째
요소에 해당이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열심히 하세요”라고 말하
죠, 하나의 길로서. 길을 가르쳐서 어디에 도달하게 하느냐 하면 여기에 도달하게 해주어
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런데 그것을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습니
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것도 생각을 해요. ‘아버지’는 사실 거기서 모든 유한한 있음들이 나
오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로부터 창조라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래서 유영모라는
분이 ‘없이 계시는 하느님’ 이렇게 해서 신이라는 절대 유일은 모든 있음이 나오는 근원자
리를 아버지라 그러는데 예수님이 내가 거기에 돌아가서 사실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러
면 내가 신이다 내가 아버지다 이렇게 얘기를 해도 될 텐데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분이 내
가 신이라거나 내가 아버지라고 얘기를 하지 않고 그 분과 나는 하나다 둘이 아니라고 말
씀을 해요. 제가 알기론 불교에서도 그냥 굳이 하나라고 얘기를 하지 않고 불이라고 얘기
를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렇게 놓고 보면 전체의식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떤 개
체성이 있는 거죠. 아까 무아에 대한 설명을 하실 때도 뭐 이런 것을 딱히 집어서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영원불변의 본체의 실체가 없다, 이런 것을 깨달았으나 지극히 일시적인 현
상이라도 있잖아요. 근데 기독교에서 같아서는 신을 섬기는 종으로서 나라는 의식으로 표
현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랬을 때 제가 교회 내부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아버지와 나는 하
나다’라는 이 분의 이 근본체험에 기도가 우리를 이끌어가야 될 텐데 현실에서 기복신앙
요소로써만 가고, 저는 뭐 우리가 불쌍한 중생으로 사니까 때로는 힘들면 “돈도 좀 벌게
해주십시오. 좋은 여자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내 자식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런 것도 필
요할 거라 생각을 해요, 폭넓게 보면. 그렇기는 하지만 근본 핵심은 늘 예수가 그랬던 것
처럼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근본체험을 겨냥하는 것이 기도고 바로 그런 기도를 관상기
도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거든요. 관상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하나가 되는 그런 것인데 신
과 하나가 되는 신이 된다고 말하지 않고 신이 나를 통해서 그 분과 나는 둘이 아니고 하
나다, 어쩠든 내가 신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생각합니다.

지관: 말씀을 들어보니까, 결국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같은 것 같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

이죠. 하나가 되는 것인데 다만 기도란 의미를 너무 일반화시키다보니 개인의 기복행위
로 되고 맙니다. 제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소원성취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싶다면 여러분들 어떻게 하느냐, 마음을 잘 쓰면 된다”고 말합니다. “마음을
잘 쓴다는 것은 부처님 시킨 대로만 하면 됩니다. 부처님이 시킨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
에 내가 뭘 이루어주세요, 하게해 주세요. 하는 것이지 여러분들이 부처님이 시킨 대로 하
고 그렇게 마음을 잘 쓴다면 따로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
서 여러분들 앞으로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이
렇게 살겠습니다라는 다짐의 기도를 한다면 여러분들은 점점 기도할 일이 없어질 것이고
아마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회: 교회나 사찰을 보면 무슨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극복해야 될 부분인데 그

런 것들을 종파에서 내 놓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돈이 들어옵니다. 제가 목회활동
을 다년간 해 본 결과에 의하면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오른손이 한 것 왼손이 모르게 하
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바꾸어야 할까요?

지관: 우리 사찰에서도 일요가족법회를 합니다. 늘 강조하는 것이 뭐냐면 “부처님은 전지

전능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무리 부처님에게 빌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입시 앞두고는 기
도를 한단 말이죠. 그랬을 때 이것은 왜하느냐, 신도들의 요구사항들이 있죠. 그러면 “여
러분들이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공간,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여러분들이
하세요.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부처님도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여러
분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될 것인가 스스로 생각을 하면 해답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을 드
립니다. “우리 아들딸이 내가 엄마로서 부모로서 해야 될 일이 뭔가 자각하고 또 자각한
것을 실천하는 그런 시간․공간 백일기도면 백일을 그런 시간이나 공간으로 다짐하고 실
천하는 그런 기회로 삼으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기복적인 기도를 우리 종교인들
이 다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을 어떡하면 좋은 쪽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
이 저희들한테 주어진 역할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이 그러셨기 때문에 백일
기도 안하고 제사도 안 지내고 천도제도 안 지내고 49제도 안 지내고, 그것은 출가할 승려
가 해야 될 일이 아니다. 사람이 죽고 난 뒤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일반인들이 해야지 우
리 출가제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하고 있거든요. 왜 일반들의 요구사항을 종교인
들이 그것을 거절 할 수 없으니까요. 다만 그것을 배제하기보다는 잘 포용을 해서 정말 근
본적인 뜻으로 좋은 뜻으로 발전시켜 나가게 하는 것이 그래서 그 분들도 밥을 짓는 행위
가 아닌 그런 것을 통해서 복을 짓는 행위, 그런 행위를 통해서 덕을 쌓는 행위로 그래서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평화롭고 안정되는 쪽으로 우리가 유도해 나가고 이끌어 나가는 것
이 종교인들의 역할인데 개중에는 그렇지 못한 종교인들이 꽤  많이 있어 참 이 나라가 지
금 이렇게 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이주엽: 저는 사실 소원성취를 비는 차원으로써 기도에 대해서 제 개인적으로 관점이 여

러 번 바뀌어 왔는데 지금은 따뜻하게 볼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실 논리적으
로 잘 해결을 보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아요. 어쨌든 근본적인 중심을 놓쳐가면서 그런 것
에 매몰되어 상황이 이렇게 지배적이냐 하며 언짢게 생각하며 인간 삶에서 그런 차원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 안에서 어떤 체험들이 있잖아요. 여러 가지 체험을 가지고
간증도 하지만 사실은 매 단계에서 그런 모든 체험들의 상태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
니다. 그러면 그 체험을 가지고 하여간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그 의식수준에 맞춰서 해석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기독교가 지금 처해 있는 의식수준이 지금 인류의 80%가 이기적
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얘기를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아부터 확실하게 세
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로 살지 못해 가지고 남이 맞춰준 정답에 따라 살고 부모가 규
정한 대로 따라 우울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한테 언제 자기를 가져본
적이 없는데 자기를 내놓고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섬기는 삶을 살아보라든지 혹은 내 새끼
만 잘 되라고 기도하지 말고 이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다면 이거  씨알도 안 먹히
는 소리거든요. 자기부터 챙기고 자기감정과 느낌 욕구를 존중하는 단계를 거치라고 하듯
이 종교에서도  과도기적으로 기복적인 면도 조금 허용할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차피 우주적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안 되니까 그럴 수는 있지는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불교도 마찬가지지만 기독교 안에서도 예수를 따르는 핵심을 놓고 그것을 겨냥 하게끔 기
도하게 해야지요. 하지만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부분들이 기복에 고착되어 있고, 중심을
상실한 체 요즈음 영성, 관상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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