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7일 설교 말씀
요한 1장 43절 ~ 51절
이정구 어거스틴 신부
소년 사무엘은 엘리 밑에서 야훼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무엘에게 나타나시어 엘리의 가문을 심판하고 그 죄를 묻겠노라고 합니다. 그 죄란 엘리의 자식들이 야훼를 모욕한 죄를 알고도 못 고친 죄, 또 제물과 예물을 소홀리 한 죄였습니다. – 귀도 어두운 노인 엘리가 사무엘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하는 말은 – 야훼께서 하시는 일 어련하시랴!였습니다.
어련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다. (개역). 영어로는 He is the Lord, let him do / what is good in his eyes. - ‘그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 보시기에 선한 것이라면 당연히 죄를 물으시고도 남으실 것이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야훼의 눈에 선한 것은 어떤 것일까요? - 그것은 성서에 기록된 야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선함이며, 이 선함이 바로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의 기준이 되며, 우리의 행실이 이 기준에 못 미치면 그 죄 값을 치뤄야 끝나는 것입니다. 판결이 나면 벌금형이든 집행유예든 구속이든,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뤄야 합니다.
어련하시랴 라고 했던 엘리의 말은 어린 사무엘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후에 이미 다 알고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이 체념을 하는 말투입니다.
내용을 잘 살펴보면 자식들이 신성모독을 하고 또 헌금을 함부로 다루고 쓴 죄입니다 -
예를 들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저를 포함해서 신자이면서도 술을 앞에 놓고 주님의 주자에 술 酒자를 붙여서 말장난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신성모독입니다. 또 교회 나올 때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옷도 그저 입던 옷 걸치고그저 습관으로 나오는 것은 아닌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 윗 세대 어르신들은 교회 나오시는 주일에는 옷을 정갈하게 입으시고 영성체 전에는 아침조차 거르시고 나오셨습니다. 연인을 만나러 갈 때는 몹시 설레면서, 또 잘 보이기 위해서 잘 차려입고 향수까지 뿌리고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이런 세속적인 준비까지 하는 것을 좋아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주님을 비웃거나 헌금할 돈을 함부로 다루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곳에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새해 헌금 서약은 액수가 중한 것이 아니라 헌금을 준비하고 대하는 신앙의 자세와 태도가 중요합니다.
서신을 봅니다. 서신은 우리에게는 자유할 권리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그리스도 몸의 지체이며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우리의 몸으로 주님을 섬기기는커녕 음란서생처럼 몸이나 정신으로 음행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당연히 자신의 몸에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몸으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서신을 구약 말씀과 연결지어 보면, 우리 몸은 이미 주님께 봉헌한 거룩한 몸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는 이 몸으로 음행을 하면 그것이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헌금할 예물을 가볍게 다루며 함부로 욕되게 사용한다면 야훼 보시기에 선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벌을 받아 마땅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복음은 뭐라고 할까요?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떠나시기 직전에 필립보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필립보가 곧바로 나타나엘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만났으니 와서 보라고 합니다. 이때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그런 인물이 나오느냐며 의심을 하면서도 예수께로 갑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 너는 거짓이 조금도 없는 정말 이스라엘사람이다. 너는 진국이다. 너는 결코 짝퉁 이스라엘사람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네게 큰일을 맡길 터인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자상을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기업이 직원을 선발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은 성실성과 근면성입니다. 정직성은 이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인을 싫어하는 것은 그들이 정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억해 보면, 우리가 가정과 학교에서 가장 혼났을 때는 정직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학교 교훈에는 성실과 정직이란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르게 살자’ 라는 말도 똑같은 말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때도 제일 먼저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감추거나 거짓으로 말할 때입니다. 왜 감추려는 걸까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과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해가 되고 사회에 누가 되어 자칫 들키는 날이면 자신이 망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추려고 합니다.
또 이 고비만 넘기면 이익을 얻거나 출세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들통이 나는 날에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위험도가 매우 높습니다. 정치인들은 이 짓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끄떡도 안 합니다. 그래서 정치는 뻔뻔해야 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정직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조차 떳떳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회생활도 자신감이 붙습니다.
오늘 설교를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벌 받아 마땅한 자들은 신자이면서 교회도 안 가고, 그날 봉헌해야 할 돈으로 음행까지 저지르고도 거짓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 한마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대단히 많습니다.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어떤 몸가짐으로 살아가야만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또 주님께서 큰일을 맡기실 것인지를 생각 좀 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저절로 사회로부터 덤으로 존경도 받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지식이나 교양이 그다지 중요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행동을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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