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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의 삶!

by 분당교회 2019. 11. 24.

2019년 11월 24일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성공회 분당교회 관할사제)

 

오늘은 교회력으로 1년의 마지막 주일인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왕은 그 섬기는 대상이, 존재 자체를 꽃피우도록 완전한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오늘 1독서는 그런 왕이 오시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레 23:5-6, “5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킬 그 날은 오고야 만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그는 현명한 왕으로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를 펴리라. 6 그를 왕으로 모시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살 길이 열려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리라.”

 

예수님이 바로 이 예언대로 오신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 안에서 최고의 인생을 살아가는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하시고자,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최고의 삶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왕이며 주님이십니다. 

 

교회력은 왕이신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대림과 성탄절, 사순과 부활절, 성령강림과 연중주일 등 1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가면서 변화하고 성숙하는 여정입니다. 

 

교회력은 3년 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난 2019년은 ‘다해’로 주일마다 루가복음을 읽었습니다. 내년은 가해로 연중주일에 마태오복음을 읽게 됩니다. 오늘은 루가복음이 보여주는 왕이신 예수님의 삶을 정리하면서, 루가가 제시하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의 삶’을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루가는 성령을 강조합니다.  

루가는 1장부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는 요한이 탄생했을 때 성령을 가득히 받아 예언을 합니다. / 루가는 복음서를 마무리하는 24장에서도 성령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제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명령하십니다. 24:49,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루가복음의 처음과 끝에 성령님이 소개되는데, 루가복음의 중간인 1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1:13,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를 처음과 끝에 있는 내용을 가운데서 다시 언급함으로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인클루지오 편집 기법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이 성령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 충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루가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간 사람을 소개합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성자 예수님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가장 존귀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도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왕이신 하느님의 통치 아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하느님 나라를 누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증인으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자의 첫 번째 특징이 성령 충만입니다. 

 

둘째, 루가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성령 충만함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존귀한 삶을 살아가실 수 있었던 능력의 비결이 기도입니다. 

 

3장 21절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십니다. 그 때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고 사명을 받습니다. 

5장 16절에, 예수님은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셔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오늘날 용어로 피정하신 거죠. 

6장 12절을 보면 12제자를 선발하실 때 밤 새 기도하십니다. 

 

11장을 보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의 기도입니다. 기도하심으로 기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신앙의 계승은 모본을 보임으로 전수됩니다.

 

루가 22장 39절을 보면,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때 예수님이 ‘땀이 피가 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드리신 가장 처절한 기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를 마치십니다. 42절,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기도는 기도자로 자아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존재로 나아가게 합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자는 예수님처럼 깨어 쉬지 않고 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떠오르는 이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세리, 사마리아인, 여인들 등등

 

1) 세리에 대한 관심

유다인의 반역자, 유대인 공동체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세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셨다고 소개합니다. 루가 15:1-2,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2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18장을 보면, 하느님께 인정하신 기도가 세리가 드린 기도입니다. 19장에서 회심의 모본으로 세관장 자캐오를 소개합니다.

 

2) 사마리아인

유다인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사렘을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지역을 벗어나면 옷을 벗어 털었다고 합니다. 유다인들이 그만큼 불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루가복음 안에는 사마리아에 대한 호의적 관심이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사마리아인들을 호의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 세 번 등장합니다. 

 

9:51-56,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책망하심 

10:25-37,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17:11-19, 치유받은 후 감사를 표시한 사마리아인. 

 

3) 여인 

‘여인’을 뜻하는 ‘귀네’라는 단어가 마태오복음에는 8번, 마르코복음에는 14번, 루가복음에는 24번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문을 보면,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오가 예수 탄생의 맥락에서 요셉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것에 반해, 루가는 마리아를 중요한 인물로 강조했습니다. 

 

루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 등장하지 않는 수많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엘리사벳(1:57), 안나(2:36), 사렙다의 과부(4:26), 나인성의 과부(7:11-17), 예수의 전도여행을 도운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를 위시한 갈릴리의 여인들(8:1-3), 마르타와 마리아(10:38-42), 18년간 허리가 굽어진 채로 살았던 여인(13:10-17),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15:8-9), 맷돌을 가는 두 여인(17:35), 불의한 재판관에게 호소한 과부(18:2-5) 등등.

 

여인들을 언급할 때 독특한 점은 남자의 이야기를 여자의 이야기와 나란히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즈가리아와 마리아, 시므온과 안나, 나아만과 사렙다 과부 등. 이는 남성과 여성이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에서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당시 여성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랍비의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4) 특별히 루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나 관심을 강도합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거의 다 부자와 연결되며 많은 경우 재정에 관한 신앙적인 태도를 언급합니다.

 

  1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 중에 53절,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4장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읽으신 말씀입니다. “18,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6장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입니다. "20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부자들에게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24-25절, ”24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25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12장 13절부터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나누지 않는 부자를 비판하십니다. “2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셨다. 21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12:33-34, 33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34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16장 부자와 나자로

  18장 부자청년에게 하신 초대의 말씀, “22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너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하셨다.” 

 

루가복음에서 부자라는 용어는 단순히 경제적 측면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신분, 사회적 특권과 같은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위상을 나타내주는 개념입니다. 부유한 계층과 사람들은 권력과 특권을 통하여 더 많은 부와 재산을 축적하고 쌓아두려고 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 계층의 몫을 빼앗거나 강탈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 부를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소유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의 출발점은 ‘부와 재산’에 대한 그들의 과도한 집착에 있습니다. 사람이 재물을 지배하지 못하면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죠. 루가복음은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묘사를 통해서 부유한 사람들의 사회적 경제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 

이처럼 루가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경계 밖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장의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 그리고 잃었던 아들 등 세 비유가 모두 잃은 것에 대한 관심과 잃은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잃은 자는 모두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 – 가난하여 죄인으로 취급받는 사람들, 세리, 사마리아인, 여인들 등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환대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루가는 19장에 나오는 자캐오의 이야기는 환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환대하는 삶으로 회심하는 모범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는 경계를 넘어서는 예수님의 환대에 자캐오도 자기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가진 재물 정도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산의 반을 나눈다는 것은 기존의 사회관계를 벗어나는 자기 낮춤입니다. 어울리지 않던 사람들에게로 나가는 새로운 삶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신자는 예수님을 따라 경계를 넘어 환대하는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오늘 서신 골로사이서에서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조차도 화해시키는 평화의 왕이시라고 말합니다. 이것의 구체적인 모습을 에페소서 2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사도 바울로는 경계를 구분하는  담을 허무시는 평화의 예수님을 따라 교회는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일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교회를 세워가는 신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루가가 제시하는 대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오직 갈망하고 기도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좋은 것 성령을 받기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루가 11:9-10, “9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루가복음의 속편인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성령 충만하면, 경계를 넘어 환대의 삶을 살아가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시작되는 대림절기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러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누리고 그 나라를 세워가는 증인으로 살게 하고자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림 절기에 기도에 전념합니다. 매일기도와 묵상에 우선순위를 두시기 바랍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사랑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해지시길 바랍니다. 하여 자기가 쌓아 두었던 경계를 허물고 불편해 했던 사람들과 화해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환대하며 하느님 나라를 세워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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