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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나눔

평신도 간증 _ 강사은 사무엘 교우

by 분당교회 2019. 10. 9.

장소 : 성공회 서울교구 평신도원 주관 선교대회

평신도 간증 : 강사은 사무엘 교우(분당교회)

일시 : 2019년 9월 29일

 

안녕하세요.  분당교회 강사은 사무엘입니다.

간증 제안을 받고 어떤 이야기를 할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안받은 것이 간증이니만큼 제 이야기를 먼저 들려드리는 것이 옳겠다 싶습니다.

 

모두 잘 지내고 계신지요?  

 

저는 자알~ 지내고 있습니다.

특히 성공회로 옮긴 이후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눈에 보이는 자연들, 책에서 보는 이야기와 문자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대하는데 마음이 참 편안~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알~ 지내고 있습니다.

 

이후 제 이야기는 별거 없습니다만 잘 헤아려 들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나의 이야기

 

저는 태어나서부터 장로교인이었습니다.  어머니 등에 업혀서 교회에 간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장 고신측 교회에서 이른 나이에 장로가 되셨고 얼마 후 방언과 같은 은사에 대해서 교회와의 의견충돌로 예장 합동으로 옮기셨더랬습니다. 그후 제가 커서 서울로 오면서 예장 통합측 온땡땡 교회에 다녔으니 대한예수교 장로회 내에서 나름 큰 교단 3군데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학교 시절엔 시간이 참 많았었나 봅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자주 교회로 가서 기도하고 집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에 배운 소요리 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제 신앙의 근간이 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는 사립 미션 스쿨이었고 점심 시간마다 기독학생회 모임에 가서 찬송하고 메시지를 듣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채웠더랬습니다. 도시락은 오전에 미리 먹고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참 소중했던 청소년 시절을 저는 예수를 생각하고 교회 학생회 활동에 집중하며 살았던 것만 같습니다.

 

중학교 생물 시험에서 이런 문제를 만났습니다.

 

“직립 보행한 최초의 인류 화석은 무엇인가?”

아마 이런 문제였을 겁니다.

답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죠. 그 정도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답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저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였고 진화론은 창조를 반대하는 잘못된 이론이라고 교회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고신측 교회에서 배운 것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행동이었습니다.요즘으로 말하자면 생기부에 기록될 점수 하나를 스스로 버린 꼴이니까요.

 

과학, 특히 생물학을 대하는 저의 태도는 고등학교 때도 계속 되었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학력고사용 선택과목으로 전통적으로 “생물”을 선택하는 학교였고 생물 시험 결과가 좋은 학교였습니다. 전교에서 유일하게 한 명이 생물을 선택하지 않고 ‘화학’을 선택했습니다. 누구일까요?  네! 바로 저입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답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과 동일한 이유였습니다. 진화론은 사실이 아니고 아직 과학이 덜 발달해서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것을 충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창조과학 이야기

 

우리 성공회는 찰스 다윈 200주년인 2009년에 한 해 앞서 2008년에 영국 성공회가 “당신을 오해했고 또 첫 대응을 잘못해 다른 사람들마저 당신을 오해하도록 부추겼던 것에 대해 사과한다”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작년에 강남에 있는 한 대형교회의 목사님이 “최근 천문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더라.”라고 해서 크게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21세기입니다.

학문이 많이 분화되고 사회도 분화되어서 달이 지구 주변을 도는 것이 천사가 굴려서 움직이는 것인지 중력에 의한 것인지, 우울증에 걸리면 귀신 들렸다고 해서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해야 하는지 병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성공회로 옮긴 이야기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그 대형교회가 제가 다녔던 교회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말은 제가 나온 뒤에 한 설교이지만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교회에서는 과학과 신학의 관계가 여전히 심하게 틀어져 있습니다. 비단 이것이 과학에 대한 태도만은 아닙니다.

 

이제 제가 성공회로 옮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요. 그 전에 영화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2016년에 상영된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는 시간을 조정하는 능력을 가진 ‘미스 페레그린’과 그녀의 보호 아래 무한 반복되는 하루, 즉 Time loop를 사는 ‘특별한 능력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한반복되는 하루’.

이 하루는 사실 2차 대전이 한창인 1943년 9월 3일에 이 아이들이 사는 어린이집 위로 폭탄이 투하되기 전까지의 24시간을 의미합니다. 반복되는 이전 기억을 계속 유지한 채 아이들에게 늘 반복되는 24시간이죠. 아이들은 그 Time loop 안에서 살아갑니다.  변화를 기대하지 않죠.

 

때마침 9월은 저의 Time loop가 시작된 달입니다. 

긴 시간 고민 끝에 다니던 교회를 그만 나가야겠다고 결심한 달이고 그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햇수로 3년째 확인하고 있는 달입니다. 개신교의 여러 총회가 상식에 맞지 않는 결론을 매년 내고 있는 달이기도 한데요.

 

예를 들어 요가와 마술을 금지하는 지침을 내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결의하고도 금년에 총회장이 있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마술쇼를 열어서 구설수에서 오르기도 했습니다. 마술쇼를 금지하는 총회도, 마술쇼를 하는 교회도, 그것을 체크하는 언론도 서로 민망한 순간이겠습니다.

 

다양성 이야기

 

인간의 삶을, 생명의 다이나믹함을 획일화시킬 수 있을까요?

특히 종교의 이름으로 말이죠. 

 

성공회 신학자 “C.S.루이스”가 원작자인 나니아 연대기를 보신 분은 그 영화 속에 나오는 다양한 생물들이 기억나실 겁니다. 우리 인간은 상상을 해서라도 다양성을 추구하기도 한다. 싶습니다. 

 

생물의 역사 38억년 동안 지구에 있었던 생물 종들 역시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양성.

이 다양성 때문에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또 다른 예로, 사람의 키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요?  

대체로 키가 작으면 유리한 ‘체조 선수’의 키와 대체로 키가 크면 유리한 ‘농구 선수’의 키로만 나눌 수 있을까요? 체조 선수도 아니고 농구 선수도 아닌 키와 키 사이의 수 많은 키들은 체조 선수도 아니고 농구 선수도 아니니 비정상일까요?

 

생물 종내 다양성도 있죠.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 중 동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신학적 다양성, 성서 해석의 다양성을 어느 교파보다 더 잘 경험하고 있는 곳이 성공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는 고백문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성소수자 이야기

 

제가 약 2년 전 9월에 교회에서 나와야겠다고 결심을 한 결정적인 계기가 이 다양성과 관련 있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운동, 지금 개신교 사이에 광풍처럼 불고 있는 “반동성애 운동” 때문이었습니다.

 

2017년은 처음으로 떨리는 가슴을 안고 두 근반, 세 근반 하는 마음으로 퀴어 문화 축제를 찾아간 해이기도 했습니다. 혼자 가기 무서워서 아이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 사실은 교육 차원에서였죠. 당시 7살 딸 아이와 11살 아들의 손을 꼬옥~ 잡고 갔었습니다. 오전에 부슬비가 내리는 날이었죠.

 

막상 가보니 이상한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광란의 파티라도 여는 곳인것처럼 얘기되었지만 야하기로 따지자면 에버랜드가 더 야합니다. 찍어온 사진을 본 친한 장로님 한 분이 놀래시면서 그러시더군요.

 

“여기가 거기가 맞아요?”

 

언론이 대서특필한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브라질 삼바 축제나 보령 머드 축제에 비하면 정말 건전하죠.

 

9월의 그날 아침 주일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이들을 주일학교까지 바래다주고 교회 원형 홀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교회 입구에서부터 포스터를 본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동성애, 동성혼 합법화 개헌 반대”

 

권사님으로 보이는 여성 한 분이 줄 앞에서부터 펜과 서명지를 들고 한 사람 한 사람 서명을 받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서명지 판을 내밀며 친절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서명해 줄 것을 요구하실 때  

 

"저는 그 서명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 라고 말했고 흠칫 뒤로 물러서며 놀라시는 그분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마치 “어떻게 이런 사람이 교회에 있나” 하는 눈빛이었죠.

 

그 눈빛의 대상인 저는 2007년부터 순장으로 약 10년간 열심으로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교회에서 순이라 함은 약 4~5개 이상 가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역 공동체의 가장 작은 단위의 모임입니다. 여름, 겨울 시즌을 제외하고 매주 모여서 약 2시간 이상 예배와 나눔 시간을 갖는 모임입니다.

저는 지역 공동체 회계도 약 6년간 했었고 나오기 전에는 부총무 역할도 했었습니다. 참고로, 지역 공동체는 수백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 아내는 저보다 더 오래인 25년 이상 그 교회를 다닌 사람이었죠.

 

육아를 이유로 안수집사 과정을 소극적으로 받지 않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나름 할 수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순장은 섬김의 꽃으로 통하는 자리였죠.

 

이런 말씀을 드린 이유는 저와 가족이 그저 대충 그 교회를 다닌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무슨 벼슬 같은 것은 아니지요.

 

카페에서 설문조사하는 것으로 끝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직접 광고를 하더군요. 혐오와 차별의 내용이 담긴 그 서명 운동에 참여해 달라고 말이죠. 본인들은 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죄악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죠. 알고 보니 국내 여러 지역에 있는 캠퍼스 교회에서 동시에 이뤄진 광고였고 서명 운동이었습니다.

 

왕왕 교인들 사이에 관련 토론이나 논쟁이 있었지만 교회의 공식 입장을 밝히는 순간이었고 토론이나 논쟁의 여지가 사그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개신교회에서는 이런 말이 최고로 통하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임계치를 넘어서는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다수와 다른 누구라고 해서 혐오하고 차별하고 배제하지 않는 분이시죠.

 

저보다 오래 이 교회를 다녔고 인간관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내에게 이곳을 떠나자고 얘기해야 했고 유아 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친구 관계도 두텁게 쌓여 있는 아이들에게도 말해야 했습니다.

 

"여보 나는 이런 예수를 못 믿겠어.

얘들아 아빠는 이런 예수를 못 믿겠다."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이루고 젖먹이 아이 둘을 키워내는 시간을 한참 지난 뒤에 보니 제가 다니는 교회는 신앙적으로는 근본주의에 빠져 있었고 성서를 보는 눈은 문자주의에 빠져 있고

정치적으로는 한창 우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과학이나 상식에 대해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반지성주의의 태도를 갖고 있었고 사회적 소수자, 특히 성소수자들에게는 거침없는 혐오의 목소리를 높이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아이들이 신앙을 배우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퀴즈

 

잠시 퀴즈를 하나 내보겠습니다.

 

만일 타임머신이 있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천동설과 지동설 때문에 재판을 받던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지구가 중심이고 태양이 움직인다는 천동설과 태양이 중심이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 중 우리 성공회 교우님들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실까요?

 

“당연히 지동설이지”라고 아마 많은 분들이 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당연하죠.  

태양과 지구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태양이 중심이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21세기의 과학 지식을 갖지 않고 그 시대에 살고 있다면요? 답은 방금 이야기했던 것과는 달리 지구가 중심이고 태양이 움직인다는 천동설입니다. 그 시절엔 천동설이 과학 정설이었습니다.

 

이후 지동설이 옳다고 알게 되었지만 천체가 타원이 아닌 원 운동을 한다는 가정 위에서 만들어진 지동설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여전히 있었고 그 정도 설명은 천동설로도 충분했습니다. 

 

갈릴레오의 주장은 옳았지만 반증 가능성이라는 과학의 속성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더랬습니다. 당시 과학을 근거로 올바른 이성을 가진 판단가라면 지동설이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성적인 성공회 교인이라면 같은 말을 하겠지요.

 

지금의 과학, 특히 정신과는 성소수자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미국정신의학회에서는 1973년에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 3판인 DSM-III에서 이미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했습니다. 2013년 DSM-5에서는 개인이 경험하는 성별 불일치 즉, 트랜스젠더도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되었고 금년 5월 세계보건기구 WHO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성서, 전통 뿐만 아니라 이성 역시 계시의 원천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성공회에서 저는 인지 부조화를 경험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기대합니다. 꽤나 최근에서야 이런 결과들이 나온 것이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을 가까이 대해본 분이라면 이런 거대한 비용의 결과 없이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분명히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공회로

 

교회를 나와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어디를 가야할 지는 정하지 못했더랬습니다. 성공회는 이사를 하면 그냥 그 지역에 있는 교회를 가면 되지만 개교회주의를 지향하는 개신교의 경우는 담임 목사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성격을 띄게 됩니다. 쉽게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대형교회를 찾는 이유 중 하나이겠습니다.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이 까다로워진 상태에서 제가 바란 것은 그 교회의 지향성이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특히, 사회의 가난한 자, 억울한 자, 힘 없는 자를 향한 지향이 건강한 교회.

 

그런 관점에서 당시 제가 보고 있던 교회는 향린 교회 공동체와 강북에 있는 청파감리교회 정도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성공회는 잘 몰랐습니다. 복음주의권에서 유명한 존스토트 신부님을 존스토트 목사님이라고 부른 것만 30년이 넘었으니까요.

 

대한 성공회를 알게 된 것은 1차 퀴어신학 아카데미를 이곳 대성당에서 참가하면서부터였습니다. 길찾는 교회의 자캐오 신부님과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분당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9월 이후 약 5개월간 가족을 교회까지 태워 주고 저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교회 지하 식당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반신반의하며 2017년 12월에 처음으로 분당교회 문을 두드렸습니다.

 

전례적 예배에 대해서 듣기만 했지 처음 경험한 시간이었습니다. 복음이 명확하게 선포되는 예배였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저를 감싸는 따뜻함에 그만 울음을 터트렸더랬습니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울었더랬습니다. 그때 휴지를 챙겨주신 교우님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내가 바라는 성공회

 

이제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경험하기로 이전 교회의 특히 반지성주의적 태도는 근본주의에 기반한 것이긴 하지만 그 운동의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전개된 것입니다. 문자로, 일명 카톡교로 불리는 SNS를 통해 성도들 사이에 퍼졌고 대세가 된 것이죠. 

 

간간히 가짜 뉴스를 주의하라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가짜 뉴스, 사실과 맞지 않는 소리는 어느덧 대세가 되었고 목회자들도 그 현상을 막지 못했고, 지금 보면 다수가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다른 생각을 가진 목회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런 분들은 여러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계약해지 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요즘은 추가로 교역자를 모집할 때 면접 단계에서 창조과학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물어본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동성애에 대한 입장이 어떤지도 물어볼 것 같습니다. 교단의 입장이 그러니까요.

 

동성애 이슈로, 창조과학 이슈로, 빨갱이 이슈로 개신교인들이 몸서리를 치다 못해 난리를 치고 있는 마당에 우리는 어떤 태도, 전략을 가지는 것이 마땅한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 교우들은 원래 상식적이고 공부하시는 분들이니까 괜찮을 것이다?가 지금까지 기조인 것 같은데요. 

 

마치 누룩이 퍼지듯,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무의식적 편향이 있습니다. 진화적 생존 기술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극복해야 할 대상은 타자가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부적으로 교육이 필요합니다.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대화를 해야 하고 토론을 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내부의 노력, 내부의 목소리로 사그라들지 않도록 계속 노력을 해야 합니다.

 

외연 확장을 위해 외부로도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지난한 싸움이 될지라도 사람들이 성공회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회를 통해 통로를 찾을 것이고 저처럼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 빛을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온-오프라인으로 만난 여러 성공회 사제님들께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공회로 옮긴 후 맨 처음 한 일 중에 하나가 페이스북에서 성공회 신부님이다 싶으면 일단 친구맺기였습니다. 왜그랬냐 하면, 혹시나 여기도 아니다 싶으면 빨리 튀어야겠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꾸밈없이 자신의 생각을 무게잡지 않고 표현하시고

평신도 앞에 주름잡지 않는 신부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겠죠?

 

지금까지 경험한 성공회 사제님들은 사목자의 역할도 역할이지만 순한 양 같으시고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개로 비유하자면 골든 리트리버, 시각 장애인 안내견 같은 분 같습니다. 불의 앞에서는 당당한 용이 되기도 하시더군요. 평신도의 말에 귀 기울이시는 자세가 뚜렷하고 먼저 관심 기울여주시는 모습에 늘 감동입니다.

 

저는 아름답다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름답다는 말.

심미적으로 아름답다는 말,

조마사가 경주마를 보며 그 외관뿐만 아니라 경주에서 이길 가능성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말, 물리학에서는 다양한 현상들을 관통하고 설명 가능한 이론을 발견했을 때 아름답다고 하는 말, 

 

저는 이런 아름다움을 성공회에 기대합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분리되며 혐오의 대상인 자들에게 여러분은 존귀한 분이시다. 아름다운 분이시다. 말하는 성공회를 기대합니다. 

 

건강한 평신도, 

성무일과로 다져진 도심의 수도사인 사제님들, 수도사님들과 수녀님들과 함께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성공회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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