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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예수 승천대축일을 맞아

by 분당교회 2019. 6. 5.

2019년 6월 2일 승천주일

설교 : 최성모 요한 사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지 40일 되신 날을, 교회는 예수 승천대축일로 지킵니다. 부활 여섯째 주간 목요일인데, 지난 5월 30일이 바로 그 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더 많은 교우님들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념하고 그 의미를 나누기 위해 오늘 주일로 옮겨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몸이 슈퍼맨처럼 땅을 박차고 올라 하늘 위로 날아가셨다는 말도 아니고,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저 높은 하늘 위로 사라지셨다는 말도 아닙니다. 지나친 공상가들의 이야기처럼 예수님이 UFO에 몸을 실어 당신의 별로 돌아가셨다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교회 밖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성서의 기록을 보면서 많은 부분에 의구심을 드러냅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는 그분의 탄생과 죽음 이후의 이야기들입니다. 성모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이야기,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이야기, 그리고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셨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이야기를 쉽게 거짓으로 여깁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을 향한 신앙고백서인 성서를 역사책이나 과학책처럼 받아들여서, 무조건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믿음을 깊은 신앙의 우선 조건으로 강조합니다. 그들이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슈퍼맨이나 손오공처럼 떠올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글자 그대로 믿으려면, 저는 이렇게밖에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처럼 교회 안팎에서 성서 말씀의 의미를 깊게 탐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함,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고의 틀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거부합니다. 허무맹랑, 황당무계,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리고 반대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런 행위를 신념 혹은 신앙으로 멋지게 포장을 하지만, 결국 그들의 행위는 자신의 사고의 틀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다시 자신의 사고의 틀 안에 가두려는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예 무시해버리는 무조건적인 거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꿔서라도 이해하려는 맹목적인 인정,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피하고 싶은 욕구일 뿐입니다. 이 욕구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새로운 무엇을 배우고, 일터에서 수많은 일들을 처리할 때에도 무엇이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어떤 자동차와 어디에 있는 집을 어떻게 사거나 팔고 빌려야 할지, 어떤 보험상품을 어떻게 가입하거나 해지하고 갱신해야 할지, 어느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하고 그 중 무엇 하나를 선택하면서 한 달, 일 년, 십 년, 평생의 시간을 채워 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옳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데이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빅데이터라는 말이 있듯,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데이터로 움직이고, 바로 이 데이터를 어떻게 잘 읽어내느냐,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 부와 가난, 행복과 불행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불확실함에 대한 통제, 불확실함으로 인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완벽하게 제거하려는 욕구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에서도 이 욕구를 베드로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모습이 눈부시게 빛나며 천상의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곧 이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서, 베드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온갖 불확실함으로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찬 세상을 떠나 영광스러운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와 함께 거룩한 시간, 거룩한 장소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불안함과 두려움은 없고 오직 확신에 가득찬 곳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 동안, 제자들의 마음도 이때의 베드로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불안함과 두려움을 거둬낸 그들은 너무나 행복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시쳇말로, 이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만한 뒷줄, 셋줄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보다 더 큰 빽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셨듯이,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의 곁을 떠나시며 그들을 세상 속으로 온전히 내보내십니다. 40일이라는 시간, 아주 충분하다는 의미의 이 시간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힘을 얻었을까요? 오늘 루가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자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 날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저자가 쓴 사도행전은 이와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참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봅니다. 보다못했던지 어느새 나타난 천사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여보시오, 갈릴래아 사람들! 도대체 왜 당신들은 여기에 서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승천을 기록한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이 땅에 남겨진 제자들의 마음을 이중적으로 표현하였지만, 사실 그 두 가지 표현이 모두 제자들의 심리를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분과 함께했던 시간, 그분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과정을 되돌아보며,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었던 제자들은 그분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에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 한 켠에 스며 올라오는 나약한 인간의 생각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계시면 안 될까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고, 우리가 더 복음을 열심히 잘 전할 수 있고, 우리가 더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계시면 안 될까요?”

 

아무리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해왔던들, 어떤 노력과 어떤 과정을 거쳐 부제품을 받고, 사제품을 받아 성직자가 되었던들, 우리 모두는 세상의 불확실함 가운데 서있고, 불안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 우리에게 당부하신 일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외려 그 불안함과 두려움에 움츠러들어, 예수님의 품에 파고듭니다. “주님! 저는 그냥 주님 품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 초막을 지어 드릴테니 저와 함께 계셔주세요!”

 

변화산의 예수님, 베다니아의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이미 다 가르쳐주지 않았느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워말라, 걱정하지말라고. 하느님께서 네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이미 좋은 것으로 다 채워주셨다고. 언제까지 너희도 저들처럼 나에게 기적만을 요구하려느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말씀, 하느님의 사랑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서 불확실한 세상에 나아가 불안함과 두려움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피해서 교회를 도피처처럼 여겨서도 안 되고, 그것들에 져서 하느님 대신 세상의 가치를 우상으로 섬기는 짓은 더더욱 안 됩니다. 

 

아이가 자라면 부모 곁을 떠나 자기만의 세상을 꾸리는 것이 이치입니다. 부모가 보여준 삶의 모범과 부모가 가르쳐준 삶의 교훈을 붙들고 따르면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내는 사람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말합니다.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어른이란 신앙생활의 기간, 교회의 직분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로 살아가는 것, 오직 그것만이 신앙의 어른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에게 건네는 당부입니다. 

 

세상의 잣대로 완벽한 실패자인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신비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대로, 우리의 머리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내심 자랑스럽게도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의 틀을 뛰어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홀로 세상에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서 말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내 눈으로 그분을 보지 못하고, 내 손으로 그분을 만질 수 없더라도, 신앙의 거룩한 신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느끼고, 그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한 주간 세상의 소란 가운데 불안함과 두려움을 맞닥뜨리면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확신을 더욱 단단히 붙들 수 있기를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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