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결혼, 가정, 그리고 하느님 나라

by 분당교회 2018. 10. 8.

2018년 10월 7일 나해 연중 27주일
김장환 엘리야 신부


결혼, 가정, 그리고 하느님 나라


자연재해로 인한 지구촌 사람들의 고통이 크기만 합니다. 지진과 쓰나미, 태풍등 원래 발생하던 것이었지만, 태풍 발생 빈도가 잦아지고 그 세기가 강해진 원인은 지구온난화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생태적인 회개가 시급하기만 합니다.  성공회선교정신 5번째의 실천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오늘 주보 공동체 소식란을 보시면 혼배공시가 나와 있습니다. 지휘자로 섬기시는 서하나 세실리아 자매와 한승수 형제의 결혼식이 10월 27일 정오 서울대성당에서 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 성공회에서는 결혼식을 ‘혼배성사’라고 합니다. 성사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결혼예식을 통해 세워지는 가정이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기에 혼배성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세워가는 것은 하느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일입니다. 


혼배성사를 통해 부부로 연합한 신랑과 신부가, 하느님을 경외하며 사랑으로 하나되어, 자녀를 출산하고 성서의 진리로 양육해가며, 천국을 경험하는 성가정을 세우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 되어야 하는 가정이 오늘날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혼으로 인해 가정이 깨집니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3위라고 합니다. 졸혼도 있습니다. 오늘날 심각한 것은 미혼과 비혼입니다. 미혼은 결혼하고 싶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것이라면, 비혼은 주체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싱글로 사는 것입니다. 



또 결혼을 했어도 저출산 가정과 자녀를 낳지 않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노령층의 비율이 높은 노령사회로 접어들었습니다.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주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악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미혼과 비혼이 늘어나고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사회경제적인 배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청년들을 N포 세대라고 했습니다. 청년들이 사회 경제적인 압박으로 인해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 세대를 지칭하는 3포 세대에서 출발하여, 내 집 마련, 인간관계 등이 포함된 5포 세대, 꿈, 희망을 포기한 7포 세대를 지나, 포기해야 할 특정 숫자가 정해지지 않고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N포세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설사 결혼을 해도 출산으로 인해 여성이 겪게 되는 경력 단절의 문제, 자녀 교육 문제 등의 이유로 저출산 가정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미혼, 비혼, 저 출산 등 가정의 위기가 많은 경우 사회경제적인 요인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회선교정신에 4번째, “불의한 사회를 변화시키 위해 노력합니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질 좋은 일자리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공정한 경제가 세워지는 것, 주택이 투기의 대상이 아닌 거주의 개념으로 바꾸는 것, 학벌 중심의 사회로 인해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전락한 공교육의 회복하는 것, 출산하고 안정적으로 자녀를 양육해 갈 수 있는 복지 씨스템이 구축하는 것,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는 양성평등의 사회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 등이 우리 교회가 기도하고 헌신해야 하는 선교적인 사명입니다. 


아울러 크리스찬 부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가정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고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들을 통해 어떻게 그 소명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진 최초의 질문이 이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의 의도가 “이혼이 신앙적으로 죄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질문합니까? 마르코 10:2, “그 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을 떠보려고 던진 질문이라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 여하에 따라 대중으로부터 얻는 예수의 인기를 떨어뜨릴 수도, 헤롯의 분노를 자극하고 헤롯이 예수를 죽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버려라, 이혼해도 된다’고 답하면 평소 사회적인 약자를 환대하던 예수님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을 입고 점차 대중으로부터 격리되게 될 것입니다. 또 ‘이혼하지 못한다’고 답하면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율법과 충돌하는 입장이 되고 무엇보다 헤롯의 분노를 자극하게 되어 헤롯이 예수를 죽이게 할 수도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파의 질문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당대 통치자인 헤롯이 이복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헤롯의 이혼과 재혼을 질책했고 이로 인해 투옥되고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이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교활하고 사악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하찮게 여깁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을 봐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여자를 버릴 수 있는 물건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는 여자를 그렇게 취급해서 남자 마음대로였습니다. 못생겨도 이혼 사유가 되었습니다. 부부 위기, 가정 파괴 대부분의 원인제공자는 남자인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 내용에 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바리사이 사람들의 음모를 무력화 시키십니다. 마르코 10:3, “예수께서는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일렀느냐?’하고 반문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코 10:4,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습니다.’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인용한 말씀은 신명기 24장 1절부터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그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이혼 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지만,” 


이 말씀은 이혼이 허락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답이 아닙니다. 이혼이 발생하게 되는 경우에 필요한 절차를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소유물처럼 여겨 함부로 소박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이혼장을 써주어 새 출발의 기회를 주도록 한 일종의 여성 보호 장치입니다. 


사실 인간은 하고 싶은 일을 다 자행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하는 일을 가로막지 않으십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원자탄으로 수많은 생명을 한꺼번에 죽여도 그냥 두시고, 여객기를 몰아 빌딩에 뛰어들어도 그냥 두십니다. 하물며 이혼이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삶이란 사람들이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강제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깨어져 신음하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아픔은 대부분 사람의 책임입니다. 다만 하느님은 인생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서신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옛날에는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최종적인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과 이혼에 관한 말씀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로 이혼장을 써주고 이혼을 허락하셨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결혼과 가정에 대한 창조주의 원래 계획인 본질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우리 사람들의 몫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이란 하느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에 담긴 하느님의 본래 의도, 혼인의 정신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마르코 10:6-9, “6 그런데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혼배성사 때 읽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주례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혼불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배우자가 진정 하느님이 짝지어주신 사람인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다른 하나는 결혼한 사람에게는 던지는 질문입니다. “지금 배우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결혼을 혼배성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결혼을 성사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여러분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사랑보다는 조건에 맞춰서 결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혼정보회사라는 곳에서 조건에 맞춰 연결해 줍니다.  거래와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하는 상대방이 하느님이 짝지어준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느님 없이, 세상적인 기준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배우자를 택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자유로운 사랑과 결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는 가정을 세워갈 수 있는 마땅한 배우자를 선택하여, 진정 혼배를 성사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결혼한 부부라면, 배우자를 하느님이 맺어주신 짝으로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볼 때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주님의 눈으로 배우자를 본다는 말이고 또 주님 앞에서 한 서약을 기억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결혼할 때, 어느 때나 서로 “순종하겠다. 사랑하겠다” 서약했습니다. 


이 두 질문은 다시 하나의 개념으로 모아집니다. 하와를 아담에게 주실 때 하신 말씀 중에 나오는 “거들 짝”(창세 2:18)이라는 단어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반대하며 돕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한 쪽이 욕심이나 세상 가치에 따라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선태하려고 할 때, 주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도록 반대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마치 성령님의 역할과 같습니다. 이 역할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부여된 역할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배우자를 하느님이 내게 붙여주신 “거들 짝”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 부부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고자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서로 경청하며 함께 기도합니다. 이럴 때 부부는 인생 여정에서 몰아치는 그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고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누리는 가정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들에게 마땅한 이유가 있는 이혼을 금지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느님이 짝지어주시지 않는 결혼이 불가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세속의 가치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배우자를 선택하고, 배우자를 하느님이 붙여주신 “거들 짝”으로 존중하며,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는 성가정을 세워가라는 주님의 요청입니다.


'말씀/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고보와 요한의 삶  (0) 2018.10.22
하느님이 하십니다!  (0) 2018.10.14
하느님의 사랑과 희년 (남기업 교수)  (0) 2018.10.02
리더는 섬기는 종  (0) 2018.09.23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0) 2018.09.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