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의 사명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살아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령이 아니라 뼈와 살이 있고 음식까지도 잡수시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제자들에게 당부합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분명 큰 기적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기적을 증언하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초능력의 소유자이심을 과시하면서 이를 선전하라는 당부가 아니라는 말씀도 아니고, 그러니 모두 나아와 엎드려 섬기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 사건에서 이런 사실적인 측면만 강조하면 예수님은 기적을 이루시는 분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느님 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보여주시길 바랐으나 예수께서는 이런 식의 기적을 보여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죄인 취급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화해와 용서와 구원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부활 사건을 단순한 기적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예수께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라는 계시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니 그를 만나고 변화되어서 하느님 나라에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과학적, 또는 고고학적으로 증명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어쩌면 이런 집착이 오히려 예수님을 작은 틀 안에 가두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 복음의 증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의 증언도 중요하지만 신앙적 체험을 통해 변화되어 증인이 된 사람들의 증언 역시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실제 보지는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으며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증인이 된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증인은 첫째 믿지 못하고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믿음의 확신이란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진정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본인이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증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의심과 불신의 벽을 넘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들에게 박해도 당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증언할 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할 때 박해받고 순교했습니다. 스테파노가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인이 된 사람들은 증언을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나약한 마음에 증인이 되는 것을 포기할 때 예수께서는 또 다시 배반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고 들은 것만을 반복해서 말한다고 해서 돌 같이 차가운 마음이 변화되기는 어렵습니다. 증인은 먼저 본인이 그리스도를 만나서 얼마나 행복한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그 삶을 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교리 암송을 잘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확신이 있다고 믿기 어려운 법입니다. 때문에 증인이 되는 사람은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증인은 자기 자신이 진리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엄연히 살아계신 예수님일 뿐이고 우리는 그를 만났음을 증언할 따름입니다. 신앙의 성숙이란 바로 우리가 증인으로 담대하게 나서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4월 19일 부활 3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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