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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종말이라는 거울 앞에서

by 분당교회 2014. 11. 25.

종말이라는 거울 앞에서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할까요?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정답’을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심한 공포와 패닉에 빠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종말의 그 날이 오면 과연 우리는 어찌 될까요? 또 지구의 종말이 쉽게 오진 않겠지만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언젠가 이 세상을 등지고 저승으로 간다면 과연 그 세계는 어떨까요?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두려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두려움과 걱정으로 인한 종말과 사후 세계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상상은 대부분 심판과 구원으로 귀결되어 왔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선운사라고 하는 고찰을 방문 하였는데 명부전이라는 전각이 있었습니다. 사후세계의 심판과 징벌을 하는 10명의 대왕의 상이 서 있고 각자 장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곳에 끌려온 사람이 살아 있을 때의 죄업을 적은 장부인 것 같습니다. 그 장부를 보는 순간 모든 인간이 자기의 장부 하나씩은 다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나의 장부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지... 그 장부에 적힌 것은 지워질 수 있는 것인지... 찢겨질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선행으로 그 죄업을 갚을 수 있는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 대왕중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염라대왕이 다섯 번째에 있는데 그 앞에서 7일간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염라대왕 앞에서 죄인이 머리채를 잡힌 채 머리를 들어 업경을 보고 비로소 전생의 일을 분명히 깨닫게 되며, 이 업경에는 죄인들이 지은 일체의 선행과 악행이 비춰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염라대왕은 호통을 친답니다. ‘네가 여기에 온 것이 예부터 몇 천만 번인지 그 수를 모르겠다. 생전에 착한 일을 하여 다시 이 악처에 와서는 안 된다고 매번 알아듣도록 얘기했건만 그 보람도 없이 또 오게 되었느냐! 너라는 죄인은 의심이 많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만 하는구나’ 하고 도깨비와 함께 조서를 읽고 방망이로 두들겨 패서 몸이 티끌처럼 부서진다고 합니다. 이 끔직한 심판에 대한 상상은 역시 도교와 불교의 신화와 전설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살아 있을 때의 선행과 악행은 반드시 심판받는다는 점은 기독교의 세계관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 미카엘은 하늘나라의 천사장입니다. 그래서 미카엘은 악과 싸우는 용맹스러운 장수로서 그려지기도 하고, 천칭을 상징으로 쓰는 재판관으로 말해지기도 합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나팔을 부는 임무와 함께 심판장에서 인간의 영혼을 저울에 달도록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천국으로 보낼 만한지 아닌지를 심의 결정하는 것은 이 저울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전설과 신화의 이야기입니다만 동양적인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심판 날에 저주받을 자와 구원받을 자에 대한 기준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복잡한 교리도 아니고 이론도 아닙니다. 그저 살아 있을 때 약한 자, 굶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풀어 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 드린 것이라고 하시면서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보살피지 않은 사람은 바로 주님을 외면한 자들이므로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이런 심판 날에 관한 이야기들은 살아있을 때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살아야 한다는 강한 교훈을 줍니다. 그 날 그 시간에 심판받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은 과연 순수한 일일까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요? 마치 부모님의 질책이 두려워해서 공부하는 학생의 마음이 아닐까요? 자신의 미래와 행복과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혼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하는 사람들은 위선의 죄를 덧붙일 것 같습니다. 따라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선한 결과를 얻으려고 한다면 오히려 더 사악한 죄를 짓게 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예수께서 질책하셨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느님의 품성을 받은 인간으로서 순수한 믿음과 마음으로서 약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따듯하게 돕고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의인은 그 순수한 믿음으로 삽니다. 종말이라는 거울 앞에서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볼 줄 안다면 깊은 회개의 은총이 다가 올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1월 23 그리스도왕 축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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