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빛과 소금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2월 9일 연중 5주일 설교 말씀)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안도현이라는 시인이 쓴 ‘연탄 한 장’이라는 시입니다. 사랑과 열정으로 남김없이 자신을 태우고 난 뒤에 허무한 재로 남는 것이 두려워서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이 되지 못했다는 말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이러저러한 핑계를 댈 뿐 어떤 실천도 노력도 못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덧붙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생령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하느님의 영으로, 하느님의 품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닮은꼴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하느님의 영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행함’으로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귀한 선물을 한 번도 사용하지도 않고 땅 속에 깊이 묻어두면 타지 않는 연탄과 같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거룩한 폼을 잡고 비단을 휘감아도 가슴이 차갑고 사랑의 실천이 없는 사람은 맛 잃은 소금이요 탈 수 없는 바위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진리의 말씀을 외우고 가르친다 한들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진공관 속에서 박제가 되어버린 이론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셨지만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닷물은 3.5%의 염분이 녹아 있으므로 물이 썩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머지 96.5%는 3.5%의 희생으로 살아있는 바다가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인구 5천만 중에 1천만이나 되는 ‘세상의 소금’(기독교인)이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느라 세상을 온통 시끄럽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에서는 타락과 범죄와 불의와 좌절은 더욱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까닭은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에는 식탁에 빵과 포도주 등 음식들이 있는데 유다가 소금 그릇을 엎지르는 것을 그렸습니다. 세상에서 소금이 되기를 포기한 유다를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맛 잃은 소금은 바로 가리옷 사람 유다처럼 쓸데가 없어져 밟힐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정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의로운 그리스도인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나누라는 말씀보다는 복 받기를 좋아했고, 이해하고 용서하기 보다는 승리하고 지배하는 것을 바랍니다. 낮은 곳으로 가라 하셨지만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하느님의 뜻이요 축복이라 합니다. 사람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치유하라 하셨지만 들춰내고 까발리고 상처를 더 깊게 하는 것을 의로운 일이라고 자위합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었기 때문에 사회의 부패를 막기는커녕 ‘개독교’라는 비아냥을 듣는 것이 현실입니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높은 데서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궁금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살까?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습니다. 몰래 무슨 일을 꾸며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보여지는 희망과 사랑의 삶이 사람들한테는 빛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을 보고서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따스한 가슴과 진리에 빛나는 눈빛을 보고 예수님을 마주칠 수 있습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