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볼의 영성
촛불의 영성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2월 2일 주의 봉헌 축일 설교 말씀)
‘한 가닥의 촛불이 우주의 어둠을 삼킨다!’고 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에 한 가닥의 촛불만 있어도 그 어둠은 사라집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꺼져버리는 연약한 불꽃이지만 한 가닥의 촛불만 있어도 사람은 희망을 보게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가난에 허덕이고 있을 때 쓴 편지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돈이 없어 여관비를 내지 못하자 주인은 식사와 차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여관 주인에게 화가 났는데 그것은 식사와 난방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양초를 주지 않았다는 것에 그는 몹시도 화가 났던 것입니다. 촛불을 밝힐 수가 없어서 책을 읽을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다는 것이 그에게는 절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기와 전등이 발명이 되고 날이 갈수록 개발에 개발을 거듭해서 도시에서는 밤거리에서도 신문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화려한 전등을 밝히면서 빛의 축제를 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촛불은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예쁘고 의미 있는 모양의 양초가 만들어집니다.
모든 종교의례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촛불입니다.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절에서도, 심지어 무당이 굿하는 곳에서도, 각 가정에서 조상들을 위한 제사를 지낼 때도, 뿐만 아니라 결혼식 같은 기쁜 행사에서도 촛불은 빠지지 않습니다. 촛불을 켜야 의식이 진행되고 촛불을 끄면 의식이 종료됩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을 고백하고 약속할 때도 촛불이 두 사람의 눈동자 속에 타오릅니다. 이렇듯 촛불은 조명 도구로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상징하는 의미로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가끔 텔레비전을 끄고 촛불을 밝히며 그윽한 차 한 잔 하면서 가족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라고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비추어주는 역할로서의 촛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촛불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어둠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는 생명과 구원의 빛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촛불을 밝힘으로서 우리 곁에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죄와 죽음과 어리석음의 어둠을 삼키는 진리의 빛을 바라보며 우리 정신과 마음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자신을 녹이며 빛과 따스함을 주는 양초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촛불은 이웃에게 나누어주면 줄수록 세상은 더욱 밝아집니다. 그렇다고 자기의 빛이 줄어들거나 쪼개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해마다 2월 2일은 예수 봉헌 축일로서 일 년 동안 교회와 각 가정에서 기도할 때 쓰일 양초를 축복합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봉헌한 의식을 기념하면서 우리도 양초를 봉헌하면서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봉헌하는 현장에는 두 사람의 나이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고 또 한 사람은 안나 입니다. 이 두 사람은 평생을 메시아 오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시므온의 찬양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주여, 이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라고 하는 시므온 송가는 우리의 전통적인 저녁기도에 노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얼마나 충만했으면 이제는 여한 없이 평안히 눈감게 되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갈망에 마음을 졸이고 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쉬움의 한 숨으로 영혼의 어둠 속에 머무는가를 생각하면 시므온의 송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한 사람의 고백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고백을 하느님 앞에서 토해내기 위해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방에 그리스도의 빛을 충만하게 채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잡다한 것들이 비워져야 할 것입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