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설교

제자들의 소명의식

분당교회 2014. 1. 27. 22:49

제자들의 소명의식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월 26일 연중 3주일 설교 말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그의 역사를 이루실 때는 항상 대신할 일꾼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위대한 응답이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이 때 이사야는 응답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처럼 성서에서 나타나는 하느님 나라의 행진은 바로 부르심과 응답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제자들을 부르셔서 하느님 나라의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어부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이들은 고기가 많이 잡히면 좋아하고 허탕 치면 속상해 하는 평범한 생활인이었습니다.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남을 가르칠 자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에서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불러서 귀하게 쓰시는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제자가 되겠다고 스스로 나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추켜세워서 된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고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에 응답한 결과입니다. 


(레오나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날 때부터 성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에 응답하느냐 회피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르심에 응답하고는 싶은데 상황이 그렇지 못해서...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나서 따라나서겠다고 하니까 예수께서는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신자들, 또는 예비 신자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또는 공동체에 바라는 것은 많으나 정작 무엇으로 기여할 것인가는 생각지 않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소명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강렬한 소명의식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없었다면 그들은 박해와 배신과 멸시를 견디지 못하고 뒤돌아서거나 주저앉아 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셨고 귀한 사역을 맡기셨다는 소명의식이 불타올랐고, 어떠한 방해도 녹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명의 눈빛으로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소명의식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얻었으며,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안타깝게도 소명의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바치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얻어야 한다는 경제논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정치가나 사업가나 근로자나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명이 맡겨졌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우선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전을 짓는 큰 공사에 세 사람의 석공이 날마다 대리석을 조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느냐고 석공에게 물었습니다. 첫째 사람은 아주 험상궂은 표정에 불평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죽지 못해서 이놈의 일을 하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둘째 사람은 아주 메마르고 무감각하게 ‘돈 벌려고 이 일을 하오. 특별한 재주도 없고...’ 셋째 사람은 아주 평화로운 표정으로 대답합니다.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대리석을 조각하오.’ 


교회에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교인 집안이라 당연한 일이고, 가족들이 성화를 부려서 교회에 어쩔 수 없이 나오고, 안 나오면 하늘에서 벌 받을까봐...

소명의식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경우입니다.


소월의 시 ‘기회’에 보면 “... 먼저 건너 강신이 어서 오리고/ 그만큼 부르실제 왜 못 갔던고...”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주님이 지금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영광의 부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소서.’라고 응답하는 충실한 제자를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