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설교

위대한 순종

분당교회 2013. 12. 23. 16:13

위대한 순종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2월 22일 대림 4주일 설교 말씀) 


기독교 교리 중에 가장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가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과학으로 설명이 안 되고 현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더러는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하는 주장하면서 그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성서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신비와 섭리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침대는 과학일지 몰라도 신앙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인간의 지성이 밝혀낼 수 있는 세계는 얼마 만큼일까요? 아무리 화성을 다녀온다 한들 온 우주를 통 털어 본다면 아마 지극히 일부분일 것입니다. 우주 만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운행하는 법칙을 어찌 인간의 짧은 지식으로 알 수 있을까요?

과학에서 불은 산소와 수소의 결합으로 일어난 에너지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의 불은 어떨까요? 불 같은 사랑, 불타는 정열, 불붙는 신앙...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불 등등 과학을 뛰어넘는 불은 오히려 더 광범하고 더욱 깊은 삶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그냥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아들이고 믿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  속으로 스며드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을 했지만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어서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큰 문책이 따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남 몰래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그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순종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라파엘이 그린 동정녀 마리아)

요셉과 마리아로서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 받고 심지어는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 할 겁니다. ‘도대체 왜? 하필이면 나를...’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영원히 함께 계시려면 그냥 내려오실 것이지 꼭 나를 이렇게 무리하고 위험하고 막막한 벼랑 끝으로 몰고 가야하나...’라고 하느님께 항변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순종합니다.(루가1:38) 참으로 ‘위대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시키는 대로만... 또는 그저 남들 하는 것처럼... 남들만큼만... 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무책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순종’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느님의 섭리에 참여하는 것이고, 자신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때처럼, 모세더러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를 때처럼 도무지 막막하고 황당한 상황에서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옳다!’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섭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 사람은 하느님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절망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불가능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섭리가 그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기에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탄생의 과정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은 높고 영화로운 곳에 가만히 앉아계시면서 우리를 감시하시고 심판하시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이 낮고 고통 많은 곳으로 오셔서 몸소 그 고난을 겪으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역사가 요셉과 마리아라는 작은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아니, 작지만 위대한 순종을 할 줄 아는 소박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장기용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