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설교

위대한 조연

분당교회 2013. 12. 17. 19:56

위대한 조연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12월 15일 대림 3주일 설교 말씀)


역사상 1인자 뒤에서 역사를 바꾼 조연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설계하고 건국했던 정도전, 세종대왕을 길이 남을 성군으로 만들었던 황희 정승, 중국의 덩 샤오핑 ... 이들은 권력의 정상에는 서지 못했지만 역사의 한복판에서 한 시대의 전환점을 만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주연이라 할 수 있는 1인자도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조연으로서 자신의 한계와 정체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국민으로부터 추앙받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1인자를 꿈꾸고 계획했다면 본인도 역사도 불행해졌을 것입니다.

성서에서도 이런 관계는 여럿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바울을 위대한 지도자로 만든 바르나바 ...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신약 시대를 열었던 인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 와서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의 명성은 경계를 뛰어넘어 이방 지역까지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추종하는 제자들이 몰려왔고 유다의 지도자들과 권력자들도 그의 앞에 나와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마태 3:11)


(세례자 요한)

사실 요한이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한테 ‘그래, 바로 내가 오기로 한 그 분이다. 내가 메시아이다!’라고 선언하고 나설 만도 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런 요한을 보고 사람들은 ‘겸손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품상 요한은 불의에 비타협적이고 추상같은 질타를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독사의 족속들아!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하고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드러운 겸손보다는 대쪽 같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위대한 점은 바로 메시아가 분명 오신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그 때가 임박했다고 하는 것을 사람들한테 알리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메시아가 아닌 마지막 예언자로서 자신을 불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져간 사람들, 하느님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 사회공동체를 향해서 잠을 깨우고 하느님에게로 되돌아오도록 외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라는 유대교 랍비이자 철학자는 예언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자는 인간의 마음을 습격하는 자이다. 양심이 끝나는 곳에서 그의 말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없이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의 무딘 마음을 습격했습니다. 소망 없이 양심을 어둠 속에 묻어버린 사람들을 향해 그의 말이 불타올랐습니다.

관객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극장 뒤쪽에서 불이 났습니다. 관객들은 재미있는 연극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극장 주인은 큰 혼잡을 피하기 위해 조용히 관객들을 설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배우들 중 인기 있는 한 사람에게 ‘당신이 나가서 관객이 당황하지 않도록 잘 설명하고 차분하게 이 극장을 빠져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막중한 사명을 띤 배우는 무대 위에 서서 ‘이러저러해서 불이 났는데 모두 차례를 지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관객들은 이것도 연극인 줄 알고 모두들 박수만 칩니다. 당황한 배우가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관객들은 더 열심히 박수만 칩니다. 작았던 불은 급속히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연기가 극장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서로가 먼저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가 그 무엇에 심취해서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고 정신 차리지 못한다면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오늘도 광야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백성이라야 삽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