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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오늘 예수는 어디 있는가? - 성탄을 맞이하며

by 푸드라이터 2012. 12. 23.

대림 4주 생수의 강 / 오늘 예수는 어디 있는가? - 성탄을 맞이하며 


“만일 오늘의 교회가 고난 받는 이웃의 얼굴과 아픔에서 오시는 그리스도의 얼굴과 음성을 동정(同定)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실패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민족주의적 메시아 신앙과 묵시문학적 상상으로 투사된 우주적 종말론 때문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메시아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전철을 밟고 기독교회는 그 기독론 신학 때문에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일지 모른다.”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나는 완전한 인간화의 경지에까지 도달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생의 소명이며 우리 모두가 성취해야 할 엄숙한 과제이다.” (네스또 파즈, <동지를 위하여>)


오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가 진정 우리의 구원자라면, 우리의 벗이라면,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예수에게 우리의 구원을 내맡길 수는 없으니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예수를 우리의 다정한 벗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자들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다. 어떻게 답하든 그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신자들의 신앙과 삶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를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신 초월적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신자는 아무래도 이 땅 이 세상보다는 내세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를 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신자는 하늘보다는 땅, 내세보다는 현세, 뭔가 신비하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  복음서에서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 먼저 예수 탄생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가 베들레헴 마구간 “말구유”(2:7, 12)에서 태어났다고, 그리고 이 성탄의 기쁜 소식을 주님의 천사를 통해 처음으로 접한 자는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었던 목자들”(2:8)이라고 보도한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동방 박사들, 다시 말해 이방인으로서 하늘의 징조들을 연구하던 점성술가들의 입을 빌려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말구유’에 대한 언급이 없는 대신 그 소식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2:3)고 보도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마태오 복음은 예수 탄생이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애써 전하려는 것 같다.


마르코 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민중적’ 색채가 가장 뚜렷한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으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1)의 서두를 연다. 즉 마르코 복음은 처음부터 기독론을 전제하고 들어가면서도 예수 개인의 출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예수가 세례(소명)를 받고 펼쳐나가는 일체의 활동을 복음으로 파악한다. 반면에 요한 복음에서는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고 가장 신학적인 색채를 풍기면서 예수의 소위 선재설을 강조한다.


각자의 신학적 관점을 모두 존중해야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위하는 것과 억압하는 것 사이의 가치판단은 피할 수 없어


대충 이 정도만 놓고 보아도, 4복음서 모두 예수 탄생의 의미를 자기 나름의 신학적 관점에서 달리 보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예수 탄생의 의미에 대한 획일적인 정답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신앙 ‘고백’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다분히 역사적 · 문학적 ‘상상력’과 결부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예수 이해, 자신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신학이나 교리를 남에게 함부로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주제넘은 일이다.


마구간처럼 초라하고 지저분한 판자촌에 사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마태오 복음에 마음이 더 이끌릴 것이다. 철야작업을 밥 먹듯이 하는 노동자라면 루카 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에 보다 친근감과 정겨움을 느낄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예수 이야기, 신앙의 역사적 실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 역동적인 예수 이해를 발견할 것이다. ‘정통’ 교리나 신학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요한 복음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각자의 삶의 처지나 관심사에 따라 이렇듯 다양한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고백과 신학의 ‘다양성’을 밑바닥에 깔고 있는 복음서의 기본정신에도 위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면, 모든 고백이나 신앙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되어야 하는가? 모든 고백, 모든 신앙, 모든 신학, 모든 교리는 ‘똑같이’ 소중하고 똑같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신자들이 서로에 대해 인간적인 존경과 개방적인 자세를 갖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은 꼭 필요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가치판단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하고 생명을 섬기는 데 이바지하는 것과 인간을 억압하고 생명을 짓누르는 것, 이 둘을 신중하고도 정확히 구별하는 일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나누려는 이분법적 태도는 위험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느 쪽이 보다 인간화와 생명의 개화에 기여하고 있는가를 따져 묻는 것은 모든 신자의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신앙과 이성은 적대적인 것이 아니다. 신앙이 하느님의 선물이듯 이성 역시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다.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이성이 없이는 신앙은 자칫 미신이나 신비로 전락하고 만다. 2천년 교회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이성을 등진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으로 빠져들어 엄청난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이성을 내리누른 중세 기독교가 무려 1천년에 이르는 암흑시대를 초래했던 것은 그 웅변적인 실례이다. 신앙과 이성은 때로는 서로 견제하고 때로는 다정히 협력하면서 함께 굴러가야 할 두 개의 수레바퀴인 것이다.


성경을 생각해 보라. 성경이 이성에 반하는가? 성경이 이성을 등진 오로지 신비체험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형성․기록된 성경이기에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뭔가 ‘신비하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들이 더러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이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기본적인 상식에 속하는 문제이지만, 성경 전체는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삶의 상황을 밑바닥에 깔고 이 소용돌이치는 삶 속에서의 구원을 성찰하고 고백하는 ‘역사적’ 문서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불가사의한 책이 결코 아니다. 축자영감설에 사로잡혀 건전한 이성을 외면한 채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다반사인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풍토에서, 신앙과 이성의 창조적 긴장과 협력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누구의 얼굴과 아픔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나


다시금 묻는다. 오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신학적 ‘상상력’과 함께 실천적 ‘이성’을 필요로 하는 물음이다. 뜬구름을 잡는 상상력이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실천적 이성 · 반성 · 성찰을 요구하는 물음이다. 그때그때의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답할 수 있는 성질의 물음이 아니다.


마태오 복음은 “최후의 심판”(25:31-46) 이야기에서 충격적인 보도를 한다. 예수를 이 세상에서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 가운데서 발견한다. 아니, 그런 사람과 예수를 ‘동일시’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40, 46절).


그리고 이 이야기에 뒤이어 바로 ‘예수를 죽일 음모’ 이야기가 나온다. 얼마나 시사적인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된 예수, 당시 사회에서 소외되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의 대명사인 ‘세리와 죄인들’(마태 9:11; 마르 2:16; 루카 5:30)의 친구인 예수, 이 예수를 당시의 종교 엘리트들과 권력자들은 못마땅해 하고 온갖 음모를 꾸며 죽음으로 내몬다. 왜? 그들의 신앙과 신학체계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는 보통 사람들과는 비할 바가 없는 뭔가 초월적인 존재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민족주의적 메시아 신앙과 묵시문학적 상상력으로 투사된 우주적 종말론 때문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메시아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서남동).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고난 받는 이웃의 얼굴과 아픔에서 그리스도를 감지하고 있는가? 한국교회의 ‘정통’ 교리와 신학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인 예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가? 이 땅의 목회자들 중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인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이들이 그 얼마나 되는가? 예수의 참으로 인간적이며 민중적인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느끼고 이 예수를 닮아 살려고 애쓰는 교인들은 또 얼마나 되는가? 이 땅의 교회와 신자들 역시 ‘기독론 신학’ 때문에 저 ‘유대교의 실패’를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한국교회는 냉철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예수를 교회 안에, 교회의 도그마 안에, 그 숨 막히는 교리와 신학체계 안에 꽁꽁 가둔 채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오늘의 자기 모습을 참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야 할 것이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인간화, 인간의 예수화, 인간성 회복으로서의 구원을 ‘이단’으로 낙인찍는 무지몽매함을 크게 뉘우쳐야 할 것이다. 이 회심을 거치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사적 소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 곁에 있다. 그대 안에 있다.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로서 그대 곁에 있다. ‘완전한 인간화의 경지에까지’ 도달하기를 꿈꾸는 그대 안에 있다. 인간답고 싶은 신음과 절규로써 그대 곁에 있다. 그대의 사랑 안에 있다.


신앙에 기대어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운명을 깨닫는 사람, 예수에 기대어 인간화를 자기 생의 소명으로 삼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다.


2012년 12월 23일 주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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