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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회개는 사회적 회심으로 확증된다!

by 분당교회 2018. 12. 17.

2018년 12월 16일 대림 3주일

회개는 사회적 회심으로 확증된다!


대림 3주일, 매일기도가 한 주 남았습니다. 남은 5일의 기도에 더 많은 교우들이 참석하여 지체들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다시 오실 주님 앞에 깨어 있는 믿음으로 굳건히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마니또 짝을 위해 중보기도도 열심히 하시고, 선물은 성탄절 예배 평화의 인사 시간에 전달하시기 바랍니다. 


성탄절 일정은 24일 월요일 성탄전야에는 밤 9시에 성탄밤예배를 노래로 드리는 저녁기도와 성찬례로 드립니다. 25일 화요일 성탄절에는 오전 11시에 감사성찬례와 세례식을 갖고, 곧 이어 축하잔치와 성탄애찬을 나눕니다. 함께 참여하여 즐겁고 뜻깊은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원래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받는 예식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했다는 것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며 자부하며 살아온 이스라엘이 실상은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공평과 정의를 누리는 하느님 나라의 모델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고자 우상을 섬기며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를 잃어버리고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갔습니다. 


이에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이 하느님 나라 백성이라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하고자, 회개를 선포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도 동일합니다. 인간의 원형인 하느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고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에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며 요단강에 와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지난 금요일 복음에 나오듯이 세례자 요한을 향해 ‘미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으로 자부하고 있는데 이방인이나 받는 세례를 받으라니 하니 요한이 미친놈인 것이죠. 


회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 때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느님은 이집트 노예로 살던 그들을 해방시키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삼으시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세워주신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보살피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1독서를 보십시오. 예언자 스바니야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가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구원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여 주실 구원의 하느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바니야 3:17,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바로 이 분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연약함과 불순종으로 죄에 빠지거나, 자초한 고난 가운데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나무라지 않으시고 안아주시며, 구원하여 주시는 좋으신 하느님입니다.


스바니야의 말씀을 복음성가로 만든 악보를 간지에 실었습니다. 개역개정의 말씀으로 가사가 되어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같이 불러보겠습니다.


회개는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알고, 이방인과 같은 삶에서 크게 유턴을 하면서 하느님을 향해 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그 길을 가다보면 감당하기 힘든 세상의 파도를 만날 때가 많습니다. 너무나 자주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한숨짓고 좌절하고 넘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기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흔들리고 기우뚱거리는 우리를 다시 세우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십니다. 오늘 서신에서 사도 바울로는 기도의 능력을 이렇게 말합니다. 필립 4:6-7, “6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며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여 오늘 성시에 나와 있는 이사야의 고백, 12:2,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이시며 나의 구원이십니다.”라는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고 찬양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하느님을 향해 회개의 여정을 걸어갈 때,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관계가 깊어집니다. 오늘 필립비서의 표현으로 하면, “너그러워 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황금률을 살아가는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이유입니다. “사랑의 섬김으로 이웃을 필요에 응답한다.”는 성공회 선교정신 3번째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제시하는 회개한 삶의 모습입니다. 루가 3:11, “11 요한은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듯 나눔과 섬김은 의무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요한 3:16-17, “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나누고 섬기며 살아가다 보면, 사랑하는 이웃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 원인이 그 사람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도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대 많은 청소년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또 자살까지 합니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들을 볼 때 한없이 불쌍하기만 합니다. 같이 놀아주고 상담도 하며 그들의 삶을 지원하는 사역자가 되기도 합니다. 정말 필요하고 아름다운 섬김입니다. 


이렇게 진실한 사랑으로 청소년을 섬기다보면, 청소년의 위기 뒤에는 입시위주의 왜곡된 교육이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교육 없는 세상” 같은 기독교 시민단체를 만들어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공회 선교정신 4번 - “불의한 사회를 변혁하며, 모든 폭력에 도전하고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노력한다.” -이 3번에 연이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3번까지는 선한 일이라고 칭찬하지만, 4번을 실천하려고 하면 비판하고 배척합니다. 


브라질 돔 헬더 까마라 주교의 말입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구제하니까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내가 가난의 구조적인 원인을 말하니까 나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우리 사회도 똑같죠? 이것은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누리려고 만들어 놓은 악한  프레임 입니다.


까마라 주교 역시 하느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섬기다 보니까, 그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보게 되었고, 그것을 개선하는 운동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간 저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난 11일 새벽,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24살 먹은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김용균 군이 컨베이어 벨트를 점검하다가 죽었습니다. 탄광 막장보다 못한 조건에서 밤샘 일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올해만도 28번이나 작업 현장 개선을 요구했건만 번번이 묵살 당했다고 합니다. 회사 간부는 빨리 시체를 치우고 컨베이어를 돌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돈 때문에 경력사원은 뽑지 않고, 돈 때문에 2인 1조가 근무해야 환경에서 매뉴얼이 없다는 핑계로 회사는 한 사람만 세운 것을 합리화합니다. 비용절감이라는 무서운 자본 앞에서 인간성은 괴물로 변하고 죽은 자의 억울함만 아파하고 정작 고쳐야할 사회적인 안전망은 돈 때문에 또 사라지는 참 악한 사회입니다. 


창세기에는 인간을 향한 근원적인 두 개의 질문이 나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카인아.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형인 카인은 동생 아벨을 책임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고 그들의 삶이 존귀하게 회복되도록 하는 책임이 먼저 교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대림 3주일입니다. 지난주일 주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올바른 일을 많이 하여, 나무 날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골방에 들어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삶은 이웃을 사랑함으로 나누고 섬기는 올바른 일을 행하는 삶입니다. 


마침내 이웃을 고통 가운데 살아가게 하는 사회를 변화시켜가는 선교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일’임을 알게 되고 실천하게 됩니다. 이것을 사회적 회심이라고 합니다. 


회개는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고 나누고 섬기다가 마침내 사회적 회심에 이르는 사랑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종말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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